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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기자의 씨네닷컴]때론 영화가 인생을 바꾸어놓는다

입력 2000-08-13 17:37업데이트 2009-09-22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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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터넷 활용실력은 문자로 치자면 겨우 문맹을 면한 정도이지만, 요즘엔 인터넷 서점을 통해 정가보다 싼 책,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비디오테이프를 사서 보는 취미가 생겼다. 비디오테이프를 살 때 자주 들락거리는 사이트는 '아마존(www.amazon.com)'이다.

언젠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의 관람등급 심의에 문제가 생겨 기사를 쓸 일이 있었다. 영화를 안보고 기사를 쓰려니 앞 못 보는 소경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격인 것 같아, 판권을 소유한 영화사에 미리 좀 볼 수 없겠느냐고 요청했는데 거절당했다.

한 등급심의 위원이 영화사에 요청한 비공식 시사에 슬쩍 끼어보려고도 해봤지만 그것도 들키는 바람에 "기자가 오면 영화를 틀지 않겠다"는 으름장을 듣고 퇴짜 맞았다.

그때 '안보여주면 누가 못볼 줄 알아'하는 심사로 '아마존'에서 '아이즈 와이드 셧' 비디오 테이프를 사서 보고 혼자 통쾌해 했던 적도 있다. 구매를 신청한 뒤 비디오테이프를 받기까지 보름이나 걸리는 바람에 당장 급했던 기사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아이즈 와이드 셧'이나 빔 벤더스 감독이 쿠바 음악의 뿌리를 찾아 떠난 다큐멘터리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등은 조만간 국내에 개봉될 영화들인데도 내가 호기심을 누르지 못해 비디오테이프를 샀던 경우라면, '트레키즈'는 국내에서 볼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샀던 비디오 테이프다.

'트레키즈' 비디오 테이프를 살 마음을 먹은 것은 4월 SF영화 '갤럭시 퀘스트'의 국내 개봉 이전에 이 영화를 더 잘 알고 싶다면 '트레키즈'를 보면 된다는, 인터넷 영화사이트 'IMDB(www.imdb.com)'의 한 이용자 평가를 보고 나서다.

'갤럭시 퀘스트'와 '트레키즈'의 관계에 대해선 석 달 전 이 난에 '갤럭시 퀘스트-오타쿠에게 보내는 찬사'를 쓸 때 언급한 적이 있다. 그 때에도 국내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트레키즈'가 최근 소리소문없이 국내에 비디오로 출시됐다. '스타 트렉'이 국내에서 인기 있었던 영화도 아니고, '트레키즈'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을 게 뻔한 다큐멘터리 영화인데 비디오로 출시될 줄이야! 비디오 제작사의 '결단(?)'이 가상하게까지 느껴진다.

제목 '트레키즈(Trekkies)'는 미국에서 TV시리즈로 오랫동안 방영됐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스타 트렉'에 열광하는 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영화는 트레키즈의 다양한 면모, 출연배우들과 팬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이다. '스타 트렉'을 모르더라도 '내게 영화가 무엇일까'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봐둘만 하다.

트레키들 중엔 정말 별난 사람이 많다. 한 중년 여성은 매일 '스타 트렉'의 배지를 달고 자신을 우주선의 부함장이라고 생각하며 24시간 부함장의 정신을 잃지 않고 살려고 애를 쓴다. 한 청년은 '스타 트렉'에 나오는 우주선을 직접 만들어보고 "날수만 있다면 다른 행성으로 날아갈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취미로 '스타 트렉'의 우주복을 만들어 입고, 자기 일터를 '스타 트렉'의 우주선처럼 꾸며놓은 사람들도 많지만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트레키들을 보면 묘한 슬픔이 느껴진다.

한 남자는 '스타 트렉'에 나오는 우주비행사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자신을 그 우주비행사의 아내라고 생각하고 우주선 복장을 만들어 입고, 치렁치렁한 가발을 쓰고 화장을 하고 산다. 한 팬은 낮에 커피를 몇 잔 마셨는지, 어딜 여행하고 싶은지 등 '스타 트렉'과 관계없는 시시콜콜한 일들을 기록해 1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스타 트렉' 제작사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10년 동안이나 자신의 현실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영화에 마음을 의탁하고 살았던 걸까….

또 어떤 사람들에게 '스타 트렉'은 인생의 지도를 바꿔놓은 운명적인 만남이기도 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난뒤에도 한 배우가 털어놓은 팬의 사연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스타 트렉' TV시리즈가 시작될 때 어린 아이였던 한 흑인 소녀는 흑인 여성이 우주 비행사 역을 맡은 것을 보고 소리치며 집안을 뛰어 다녔다고 한다. "TV에 흑인 여자가 나왔는데, 가정부가 아냐!"

'스타 트렉'을 통해 흑인여성도 원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 이 소녀는 성장한뒤 우리도 '아, 그 사람!'할 정도인 유명인사가 됐다. 그가 누구인지 여기서 말해버리면 영화 보는 재미를 뺏는 결과가 될테니, 궁금하면 '트레키즈'를 직접 보는 수 밖에.

또 한 유치원 교사는 백인과 유색인종,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나오는 '스타 트렉'을 통해 아이들에게 인종과 민족의 다양성을 가르친다. 한 흑인 소년은 '스타 트렉'의 미래사회를 동경하며 최초의 흑인 우주비행사가 됐고, 또 한 백인 소년은 '스타 스테이션'이라는 영화를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들 꿈을 키워가고 있다.

성경과 '햄릿', '세서미 스트리트'의 노래까지 '스타 트렉'에 나오는 외계인 종족 클링곤의 언어로 번역하는 트레키들을 보면 기가 찰 정도이지만, 이들은 '스타 트렉'을 통해 꿈을 키우고, 슬픔을 달래고, 누구나 평등하게 살 자격이 있다는 가치를 배운다.

좋은 책이 그렇듯, 때론 영화도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스타 트렉'을 통해 불투명한 미래로 항해할 나침반과 좋은 길벗을 얻게 된 트레키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은 한 환자는 '스타 트렉'을 보며 수명이 연장됐다고 한다. '트레키즈'를 보며 '스타 트렉'을 갖고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우리는 그런 영화를 갖고 있는가?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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