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인공지능(AI) 및 산업 전 분야에 걸친 네트워크화로 디지털 기기의 교체 주기가 빨라지면서 개인은 물론 기업, 공공기관에서 쏟아지는 사용후 정보기술(IT) 장비의 규모가 매년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이 장비들이 수명을 다해 배출된 뒤 개인정보 파기와 재활용 등이 어떤 경로로 이뤄지는지 추적하는 체계는 국내에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용후 IT 자산의 안전한 폐기·재활용·재판매를 전문으로 다루는 ‘ITAD(IT 자산 폐기) 산업’이 선진국에서 국가 전략 과제로 떠오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ITAD 산업의 글로벌 시장 규모는 2024년 약 250억 달러(약 37조 원)에서 2030년 370억 달러(약 55조 원)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며 미국과 유럽은 GDPR과 같은 규정을 기반으로 R2V3, NIST SP800-80 표준을 만족하는 전문기업들이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중국 역시 2008년부터 도시광산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지정해 체계적으로 육성해왔다. 반면 국내에서는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사용후 IT 장비의 단순 매각 등 시장경제에 의존해 왔고 관련 산업 단체조차 없었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지난달 ‘한국아이태드산업협회’가 창립총회를 열고 정식 법인 출범을 앞두고 있다.
정보 보안이 필요한 서버 추적 불가, 밀수출, 기술 유출… 드러나는 관리 공백
국내에서 폐기되는 사용후 IT 장비 가운데 처리 경로가 공식 기록으로 남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협회에 따르면 상당수의 폐기 IT 장비는 기업 또는 기관이 워낙 고가로 매각하기 때문에 매입 주체인 자원순환업체 입장에서는 경제적·기술적 한계로 대부분 비공식 경로를 통해 해외로 유출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데이터 파기 절차 없이 처분된 서버와 스토리지에는 개인정보, 금융 거래 내역, 의료 기록, 기업 기밀 등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 특히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첨단 장비의 폐부품을 분석하면 데이터센터의 설계 방식이나 핵심 장비 구성까지 유추할 수 있어 정보 유출이 기술 유출로 이어지는 구조적 위험이 존재한다.
군부대와 공공기관의 경우 기기 교체 후 폐기 절차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사례가 빈번하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여기에 자원 안보 이슈도 더해진다. 폐기 IT 장비에 함유돼 있는 일반적인 희소금속(금, 은, 팔라듐, 네오디뮴, 인듐, 코발트, 탄탈럼 등), 즉 ‘핵심 광물’ 함유량은 일반 가전제품에 비해 인쇄회로기판 면적 대비 6∼9배 정도로 월등히 높다. 더구나 AI·5G 인프라 확산으로 폐기량 증가 또한 가속화되고 있어 체계적 관리 없이 해외로 빠져나간다면 핵심 광물 수급에도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다. 반도체 등 고가 장비의 중고 매각이 경제적 손실에 그치지 않고 국가 안보 차원의 문제로 다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가이드라인-플랫폼-생태계, 협회가 그리는 청사진
협회가 올해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은 ‘ITAD 서비스 가이드라인’ 제정이다. 보안 인력에 의한 전문 운송, 자산 목록화, 데이터 파기(논리적·물리적), 잔존 가치 회수(재판매·재활용), 파기 증명서(COD) 발행으로 이어지는 전 공정에 명확한 기준을 세우는 작업이다. 적용 대상은 데이터센터, 통신장비, 금융권, 의료기관, 에너지 제어 시스템 등 국가 핵심 인프라 전반을 포괄한다.
이와 함께 사용후 IT 장비 배출 시점부터 최종 처분까지 전 과정을 실시간으로 기록·관리하는 전용 플랫폼도 구축할 계획이다. 단계별 이력이 전산으로 남는 만큼 책임 소재가 명확해지고 처리 경로의 투명성도 높아진다. 생태계 측면에서는 보안 운송, 정보 삭제, 탄소 검증 등 분야별 전문 사업자를 발굴하고 한국형 국가 표준(KS) 제정을 단계적으로 추진한다. 아울러 탄소배출량 전체의 78%가량을 차지하는 Scope3(간접배출) 측면의 탄소감축 효과를 정량화해 자발적 탄소 시장(VCM) 대응 기반을 마련하는 한편 배출 기업과 기관에 그 결과물을 제공함으로써 ESG를 지원할 계획이다. 또한 자원 안보 측면에서 사용후 IT 장비 자원 순환 과정의 핵심 광물 유통·처리 데이터베이스도 구축한다. 협회는 산업통상부를 주무 부처로 하는 사단법인으로 IT·보안·LCA 분야 전문가 20여 명이 참여할 계획이다.
통신장비, 네트워크 장비류의 스크랩 사진 부처 칸막이 개방은 ITAD 산업 성장의 열쇠
ITAD 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구조적 장애물 중 하나는 정부 내 다원화된 관할 체계다. ‘핵심광물’은 산업통상부, ‘폐기물’은 기후에너지환경부, ‘정보보안’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및 행정안전부(개인정보보호위원회) 등이 각각 소관함에 따라 여러 영역을 아우르는 ITAD 산업은 제도적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부처별 칸막이가 뚜렷한 만큼 통합적인 산업 육성 정책이 나오기 어렵고 이는 민간의 투자와 사업화를 더디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협회는 민·관 전문가가 함께 참여하는 ‘통합 관리 기구’ 설립을 요구하며 ITAD를 국가 전략 과제로 격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 협회가 최종 목표로 제시하는 것이 3대 핵심 기준의 정립이다. 첫째는 데이터 파기의 기준 확립, 둘째는 제3자 감시 및 보고 시스템 도입, 셋째는 최종 용융 처리를 통한 완전한 정보 보호 및 순환자원 체계 구축이다. 이 세 가지 기준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될 때 국내 ITAD 산업은 비로소 신뢰할 수 있는 인프라 위에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협회의 판단이다.
“표준 없이는 시장도 없다… 지금이 골든타임
김재찬 한국아이태드산업협회 회장 인터뷰
김재찬 한국아이태드산업협회 회장은 개인 및 기술정보의 완벽한 파기, 핵심 광물 확보를 통한 국가 자원 안보, 탄소중립 실현 등 세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산업이 바로 ITAD 산업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폐기물’에 대한 인식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현재 국내에서 반도체 폐기물이 여전히 일반 쓰레기로 분류되고 있다는 점을 가장 먼저 짚었다. 자원으로서의 가치와 보안 위험을 동시에 품은 폐IT 장비가 제도적으로는 그저 ‘폐기물’에 불과한 현실이 산업 육성의 출발점조차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내에서 발생하는 IT 장비와 자원의 보고인 부산물이 해외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국내 순환 경제를 도모할 수 있는 법제화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가까운 중국과 일본은 이미 18년 전부터 소위 ‘도시광산산업’ 육성 발전에 많은 재정적·제도적 지원을 해 오고 있습니다. 정부와 산업계의 많은 관심과 지원을 당부드립니다. 지금 이 산업에 필요한 건 거창한 구호가 아닙니다. 법 한 줄, 기준 하나가 수십 년을 좌우합니다. 그 첫 줄을 쓰는 것이 저희 협회의 역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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