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허드슨야드 건축가가 우리 아파트에… 해외 설계사 모시기 경쟁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2월 21일 01시 40분


[위클리 리포트] 재건축-재개발에 부는 해외 협업 붐
올해 ‘압·여·목·성’ 수주전 치열… 차별화 위해 해외 건축회사 섭외
프리츠커상 수상 건축가 등… 국내 설계사-시공사와 손잡아
강북 단지도 ‘해외 협업’ 요구
“설계 단계마다 비용 부담” 비판도… “건축 다양성 위해 활용해야”


《세계적 건축가가 우리 아파트 짓는다?

외국인 설계사가 재건축·재개발 아파트 시공권을 따낼 열쇠로 주목받고 있다. 차별화된 아파트 디자인을 위한 협업 시도가 늘고 있지만, 실내 평면은 국내 업체와 큰 차이가 없고 건축 비용만 높인다는 비판도 있다.

올해 서울 ‘압·여·목·성’(압구정 여의도 목동 성수) 등 핵심 재건축·재개발 입지에서 시공사 선정을 진행 중인 단지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수주전이 치열한 만큼 차별화를 위해 해외 유명 건축가가 연신 호명되고 있다. 양쪽으로 갈라진 독특한 외관으로 ‘모세의 기적’이라 불리는 이화여대 캠퍼스복합단지(ECC)를 설계한 도미니크 페로, 벌집을 닮은 미국 뉴욕 허드슨야드 전망대 ‘베슬’의 토머스 헤더윅 등 해외 유명 건축가를 아파트 단지 설계사로 앞세우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를 놓고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외관에서 벗어나 ‘유일무이’한 아파트가 되려는 새로운 시도라는 평가와 실속 없는, 이름값 없는 장사라는 비판이 엇갈린다.》



3317채 규모 재건축을 추진하는 서울 양천구 목동신시가지 3단지. 이곳에서는 지난달부터 설계업체 선정을 두고 삼파전(三巴戰)이 벌어지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국내 설계사 2곳이 글로벌 업체와의 협업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거론되는 해외 업체는 ‘아르카디스’와 ‘유엔스튜디오’다. 두 곳 모두 네덜란드에 본사를 두고 있다. 아르카디스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있는 5성급 호텔로 유선형 블록을 쌓아 올린 것 같은 독특한 외관의 ‘아틀란티스 더 로열’, 유엔스튜디오는 세잎클로버 모양으로 생긴 독일 메르세데스벤츠 박물관 등을 설계해 이름을 알린 업체들이다.

도미니크 페로
도미니크 페로
이화여대 캠퍼스복합단지(ECC). 동아일보DB
이화여대 캠퍼스복합단지(ECC). 동아일보DB
서울 압구정2구역 재건축 단지 설계를 맡은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는 이화여대 캠퍼스복합단지(ECC)로 국내에서 잘 알려져 있다. 압구정2구역에서 그는 한강을 단지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한강변에 건축물 대신 축구장 16개 규모의 대형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디에이그룹 제공
서울 압구정2구역 재건축 단지 설계를 맡은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는 이화여대 캠퍼스복합단지(ECC)로 국내에서 잘 알려져 있다. 압구정2구역에서 그는 한강을 단지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한강변에 건축물 대신 축구장 16개 규모의 대형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디에이그룹 제공
압구정 일대 재건축 단지에서는 해외 건축가와의 협업이 단계별로 거론된다. 이 지역에서 가장 속도가 빠른 압구정2구역(신현대)은 2023년 6월 프랑스 건축가인 페로와 협업한 디에이그룹엔지니어링 종합건축사사무소(디에이건축)를 설계사로 선정했다. 페로는 ECC, 영동대로 광역복합환승센터 등을 설계했다.

토마스 헤더윅
토마스 헤더윅
뉴욕 허드슨야드 ‘베슬’. 삼성물산 제공
뉴욕 허드슨야드 ‘베슬’. 삼성물산 제공
이후 시공사로 선정된 현대건설은 영국 건축가인 헤더윅이 이끄는 헤더윅 스튜디오와의 설계 협업을 강조하고 나서기도 했다. 헤더윅은 뉴욕 맨해튼 베슬과 허드슨강 인공섬 프로젝트인 ‘리틀 아일랜드’, 일본 도쿄 내 8만1000m² 용지에 조성하는 복합시설인 아자부다이힐스 등을 설계한 건축가다.

미국 뉴욕 허드슨야드 ‘베슬’로 유명한 영국 건축가 토머스 헤더윅은 서울 여의도 대교아파트 재건축 특화 설계를 맡았다. 그는 대교아파트가 한강변에 있다는 입지를 살려 100년 후를 내다보는 설계를 하겠다고 밝혔다. 대교아파트 재건축조합 제공
미국 뉴욕 허드슨야드 ‘베슬’로 유명한 영국 건축가 토머스 헤더윅은 서울 여의도 대교아파트 재건축 특화 설계를 맡았다. 그는 대교아파트가 한강변에 있다는 입지를 살려 100년 후를 내다보는 설계를 하겠다고 밝혔다. 대교아파트 재건축조합 제공
영등포구 여의도동 대교아파트 재건축조합은 지난해 아예 국제공모를 실시해 헤더윅을 특화 설계 담당 해외 설계사로 선정했다. 국제 공모 프레젠테이션에는 헤더윅이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조합에 따르면 헤더윅 스튜디오는 설계 전 과정에 참여할 예정이다.

● 강북 재개발도 “해외 설계사 협업 우대” 내걸어

해외 설계 도입은 주로 공공에서 활용하던 수단이었다. 대다수 아파트 단지가 남향 판상형 구조로 외관이 ‘성냥갑’ 같다는 비판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대표적으로 2010년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주도한 서울 강남구 보금자리주택 개발이 있다. 당시 2개 블록에서 국제 설계공모가 진행돼 각각 일본, 네덜란드 건축가 설계안이 당선됐다. 준공된 아파트는 이웃과의 소통을 추구하기 위해 현관문을 통유리로 설계하거나 유럽식 중정(中庭)을 도입하는 등 기존 아파트 문법을 깨뜨려 주목받았다.

최근에는 민간이 이끄는 강북 재개발단지에서도 해외 설계를 도입하는 추세다. 재개발단지인 서울 용산구 보광동 한남4구역은 유엔스튜디오와 협업해 한강 변에 가까운 주동을 층별로 회전하는 듯한 원형 모양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시공사 선정 단계인 성동구 성수전략정비구역 4지구에서는 대우건설과 롯데건설이 각각 리처드 마이어,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립한 설계사와 협업하겠다고 나섰다. 두 건축가 모두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다.

조합이 업체 선정 단계에서 해외 업체와의 협업을 공개적으로 권장하기도 한다. 2000여 채 재개발단지인 성수3지구, 4823채 규모 재건축 단지인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성산시영 모두 설계 공모 지침에 ‘해외 건축가와 컨소시엄 시 우대(권장)’ 조항을 기재했다.

이는 해외 건축가가 예술과 창의성을 담은 특별한 단지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조합원들의 기대가 만들어 낸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재건축 단지인 여의도동 대교아파트 측은 헤더윅 스튜디오에 단지 설계를 맡기며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인 대표 주거 공간으로 도약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지자체 인허가를 원활하게 받기 위한 기초작업이라는 해석도 내놓는다. 지자체장이 선호하는 건축가 또는 해외 순방 때 만난 설계사 등과 협업한 설계안을 제시하면 각종 인허가를 받을 때 실무진에서 문제 삼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건설사들도 이런 조합원들의 기대감을 수주 마케팅 포인트로 적극 활용하면서 협업 범위는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단지 설계뿐만 아니라 조경, 외관, 구조 계산 등 특정 분야에서도 해외 업체를 끌어들이고 있다.

● “실무는 국내 업체가”… “알맹이 없다” 비판도

업계에서는 수주 이후 결과물을 따지면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먼저 지출 비용이 늘어난다. 업계에 따르면 해외 건축가에게 설계 업무를 맡기는 비용은 국내 설계사 대비 2배 이상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설계 단계마다 비용을 내야 하는 것도 문제다. 설계사 간 경쟁 때는 전체적인 구상을 담은 기본설계면 충분하다. 하지만 인허가, 시공을 위해서는 이보다 상세한 도면을 작성해야 해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착공 이후 현장 상황에 맞게 도면을 수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초기 개념설계는 해외 업체에서 맡지만 설계 변경은 국내 회사가 맡는 경우가 많다.

해외 설계를 도입하더라도 주거 공간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경우도 있다. 해외 업체는 외관 설계만 맡고 내부 평면은 국내 회사가 설계하기 때문이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해외 설계사가 참여한 아파트라고 해서 다른 현장과 차별점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며 “국내 아파트 시장에서 선호되는 평면을 무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국내 설계사는 해외 업체가 실제 기여도 대비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한 대형 설계사 임원은 “해외 건축가들은 중국 부동산 시장이 무너진 이후 한국을 주요 시장으로 판단하고 작품 전시회도 적극적으로 열고 있다”면서도 “당선 이후에는 본인의 이름값 덕분이라며 설계 변경 업무에 참여하지 않고 대가를 요구하거나 경쟁에서 떨어지더라도 실비(實費)를 청구하기도 한다”고 했다. 다른 대형 설계사 임원은 “지자체장 등 설계사 선정 권한을 가진 이들이 지나치게 해외 건축가를 선호해 국내 시장이 글로벌 ‘호구’가 되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고 했다.

구조적인 문제라는 평가도 있다. 국내 건축 시장은 대기업 건설사가 주도하는 아파트 위주로 시장이 짜여 있다. 이 때문에 개별 건축가가 독창성, 심미성 등 실력을 키우고 보여줄 기회가 적고, 새로운 디자인과 설계가 필요할 때는 해외 건축가를 찾는 악순환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2024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 수상자인 위진복 UIA건축사사무소 소장은 “건축 설계는 의료나 법률처럼 전문가 서비스에 속하지만 국내에서는 설계 실력을 보여줄 기회가 적다”며 “국내 건축 시장의 다양성이 회복되기 전까지는 해외 건축가를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는 풍조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해외 건축가와의 협업을 획일화된 국내 아파트 문화에 다양성을 불어넣는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지엽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는 “설계를 해외 업체에 맡기면 생각보다 조합원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커진다”며 “단순한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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