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R&D 연속성 중요, 두명 6시간씩보다 한명 12시간이 효율”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2월 19일 03시 00분


[반도체법 불발 후폭풍]
‘주52시간’ 발목 잡힌 韓 반도체
美-日 규제 없애고 연구에 올인… 삼성-SK 기술력 턱밑까지 쫓아와
보조금-세제 등 정부 지원 열악… 대규모 클러스터 전력망도 시급

“해외 경쟁 기업은 주 52시간제와 같은 규제 없이 밤낮으로 연구해 이제 기술 격차가 거의 없는 상태다. 지금 이대로 뒀다가는 추월당하는 것도 시간문제다.”(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

“첨단 산업은 한정된 시간을 얼마나 집중해서 투입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 미국, 일본처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연구개발(R&D)을 할 수 있어야 한다.”(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부 교수)

17일 국회에서 반도체 R&D 부문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 법안이 무산된 것에 대해 반도체 산업 전문가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반도체 업계는 올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2기 출범에 따른 불확실성 확대와 중국·일본의 맹추격, 대만의 파운드리(위탁생산) 패권 강화 등으로 그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한국이 역대급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독보적인 기술력 확보가 필요하며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을 통한 집중적인 R&D가 시급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 “24시간 고객 대응해야 하는데 무조건 불끄고 퇴근”

한국 반도체 업계가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을 간곡하게 촉구하는 이유는 이제 더 이상 미국, 일본 등 경쟁국 기업과 기술력에서 큰 차이가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글로벌 시장을 양분하던 최첨단 D램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은 올해 미국 마이크론의 급부상으로 균열이 커질 전망이다. HBM은 2023년만 하더라도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합쳐 95%로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는데 마이크론이 두 자릿수 점유율로 치고 올라오는 것이다. 파운드리에서는 1등 TSMC를 쫓기에도 버거운데 미국, 일본의 추격까지 거세지는 상황이다.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장이 열리는 2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공정이 대표적이다.

업계에서는 주 52시간제의 일률 적용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다고 입을 모은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고객사의 요구에 맞춰 설계를 수정, 보완해야 하는데 근로시간 규제를 지키다 보면 이런 대응이 한없이 늦어진다는 것이다. 한 반도체 기업 임원은 “한창 일이 많을 때에는 글로벌 각지와 24시간 소통하며 연구개발에 매진해야 하는데 6시만 되면 불 끄고 퇴근하라는 획일적인 규제는 이런 실정에 전혀 맞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게다가 일손이 모자라다고 무작정 사람을 늘려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학회 회장은 “반도체 R&D는 연속성이 중요해 두 사람이 나눠서 6시간씩 연구하기보다 한 사람이 12시간을 끊김 없이 연구하는 게 훨씬 효율적인 분야”라며 “주 52시간 근무 제도를 풀지 않고서는 최첨단 반도체의 경쟁력을 키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을 두고 “특정 기업(삼성전자)만을 위한 법”이라는 주장도 하지만 다른 반도체 기업에도 절실한 문제다. 안현 SK하이닉스 개발총괄 사장은 지난해 말 한 행사에서 주 52시간제와 관련해 “개발을 하다 보면 관성이 붙어 대만 TSMC도 엔지니어가 오래 일하면 특근 수당을 주는 등 장려한다”며 “(52시간제는) 개발 활동에 부정적인 관행을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 최저한세·전력망 리스크도 발목

국내 반도체 산업은 보조금 및 세제 등 정부 지원과 전력망·용수 등 인프라에서도 해외보다 열악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날 세액공제를 확대하는 법안이 상임위에서 통과됐지만 막상 반드시 내야 하는 세금인 대기업 최저한세(17%)에 걸려 받을 수 있는 혜택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공제 대상인데도 혜택을 다 받지 못하는 상황은 개선돼야 한다”며 “글로벌 추세에 맞게 우리도 최저한세를 폐지 또는 축소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 구축하고 있는 대규모 반도체 클러스터를 뒷받침할 전력망 확충도 시급한 과제다. 한국전력에 따르면 18일 기준 2022년 수립한 10차 송변전 설비계획에서 신규 수립한 283건의 사업 중 현재 착공에 들어간 것은 단 2건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모두 준비(169건) 또는 입지선정(112건) 단계로 지역 주민 및 지자체의 반대에 가로막혀 건설이 지연되고 있다. 21대 국회부터 전력망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하고 범정부 컨트롤 타워를 세우는 전력망특별법이 발의돼 논의됐으나 통과되지 못하다가 뒤늦게 17일 상임위에서 처리했다.

정연제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 교수는 “정부가 새 법을 토대로 하루빨리 사업에 속도를 내 클러스터 구축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반도체 업계#주 52시간제 예외 적용#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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