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미 남쪽 끝에 있는 인구 450만명의 파나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뒤 뉴스의 중심으로 떠올랐죠.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길이 82㎞ 물길, 파나마 운하를 둘러싼 갈등 때문인데요.
파나마 운하 운영권이 미국에서 파나마로 완전히 넘어간 지 25년. 이제 와서 “운하를 되찾겠다”고 트럼프 대통령이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한 영토확장 야욕으로 치부하기엔 다양한 요인이 얽혀 있는 복잡한 문제인데요. 트럼프 대통령의 ‘운하 탈환’ 도발에 담긴 지정학을 들여다보겠습니다.
1년에 약 1만4000척의 배가 오가는 파나마 운하. 세계 교역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지대하죠. 전 세계 해상 무역의 6%를 차지하고요. 미국(71.8%)과 중국(22.7%), 일본(14.5%), 한국(9.8%)이 가장 큰 이용국(출발 또는 도착지)입니다(2023년 기준).
지난 수십 년간 평화로웠던 이 운하에 심상찮은 물결을 일으킨 건 1월 20일 트럼프 대통령의 폭탄 같은 취임연설이었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어리석은 선물(파나마 운하 양도)로 인해 매우 나쁜 대우를 받았고, 파나마의 약속은 깨졌습니다. 중국이 운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운하를) 중국에 준 것이 아니라 파나마에 준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되찾을 것입니다(We are taking it back)!”
파나마 운하는 미국이 파나마에 준 거다? 뭐, 틀린 말은 아닙니다. 파나마 운하 건설은 미국이 한 것 맞습니다. 1903년 미국이 운하구역에 대한 영구적·독점적 권리를 사들였고, 막대한 건설비(3억3665만 달러)와 노동력, 신공법을 투입한 험난한 공사 끝에 1914년 운하가 개통됐죠.
그리고 1977년 지미 카터 대통령은 파나마와 두 개의 조약을 맺었습니다. ①1999년 12월 31일까지 파나마 운하 운영권을 파나마에 양도한다. ②운하 운영의 영구적 중립을 보장한다. 만약 중립이 위협당하면 미국이 개입할 수 있다. 이에 따라 1999년 12월 31일을 기해 운영권은 파나마에 완전히 넘어갔죠.
그럼, 당시 미국은 국익에 반하는 데도 어리석게 운하를 넘기는 관대하면서도 어리석은 짓을 한 걸까요? 따져보면 그건 아닙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는 듯하지만, 48년 전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뒤에서 좀 더 설명하겠고요.
1월 20일 취임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파나마 운하를 언급했다. AP 뉴시스트럼프 대통령의 다른 두 가지 주장, 미국이 나쁜 대우를 받고 있고 중국이 운하를 운영한다는 건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파나마 운하 요금이 지난 몇 년간 가뭄 탓에 급격히 오르긴 했지만, 모든 배는 국적과 상관없이 똑같은 통행료를 적용받죠. 5일 미국 국무부는 파나마가 미국 정부 소유 배엔 운하 통행료를 면제해 주기로 했다고 발표했는데요(이후 파나마 운하청은 이를 부인). 만약 이렇게 된다면 이게 오히려 특혜이고, 중립 위반입니다.
파나마 운하 운영권은 어디까지나 파나마의 독립적 국가 기관인 파나마 운하청에 있습니다. 운하 운영에 있어 다른 나라의 개입은 없죠.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운하가 아니라 운하 끝에 있는 항구 운영권이 홍콩기업 CK허치슨에 있다는 점을 가리켜 ‘중국이 운하를 운영한다’라고 일부러 틀리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식으로 왜곡하는 데는 다 의도가 있죠.
48년 전 무슨 일 있었나
120여 년 전, 미국이 파나마 운하 개발에 나선 데는 군사적 이유가 컸습니다. 해군 군함이 대서양과 태평양을 빠르게 오갈 수 있는 물길이 필요했죠.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무렵이 되자 그 군사적 가치는 확 떨어졌습니다. 수문이 너무 작아서 항공모함이 통과할 수 없거든요.
이즈음엔 운하의 경제적 의미도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황량했던 미국 서부도 동부처럼 산업화됐기 때문이죠. 운하 통행료가 낮게 유지돼, 돈벌이도 시원찮았고요. 해리 트루먼 대통령(1945~53년 재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쫓겨나기 전에 우아하게 파나마에서 나가지 않겠습니까.”
1977년 파나마와의 조약 체결 뒤 연설하는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 파나마 운하 운영권을 1999년 말 영구히 파나마에 넘기는 이 조약에 대한 반대여론이 거셌지만, 이듬해 상원은 간발의 차이로 조약을 비준했다. 미국 의회 도서관1950년대 후반부터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선 민족주의 열기가 분출했고, 파나마는 그 중심이었습니다. 파나마에선 반미시위가 수년 동안 이어졌고 급기야 1964년 운하 지대의 국기 게양을 둘러싼 충돌로 24명이 사망했죠. 전 세계가 미국을 맹비난하고 나섰는데요.
“운하를 돌려주지 않으면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헨리 키신저가 경고했습니다. 파나마에서 어떻게 발을 뺄까.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각각 방법을 모색했지만 진전은 없었습니다. 미국 보수층 상당수가 반대할 게 뻔한데 굳이 정치적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특히 공화당의 스타 정치인 로널드 레이건은 운하 반환 반대의 선봉에 섰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죠. “우리가 샀다. 우리가 비용을 지불했다. 우리가 건설했다!”
1977년 지미 카터 대통령이 나섰습니다. 파나마와 운하 양도를 위한 조약을 체결했고요. 문제는 반대 여론을 뚫고 상원 비준(3분의 2 찬성)을 받아낼 수 있느냐였는데요. 공화당 강경파에 대한 매우 끈질긴 설득 작업 끝에 1978년 간신히 비준이 성사됩니다.
이후 미국의 파나마 운하에 대한 관심은 빠르게 식어갔습니다. 레이건은 대통령 집권 뒤에 파나마와의 조약을 건드리지 않았죠(1981~89년 재임). 뉴욕타임스는 이에 대해 “레이건 자신이 틀렸고 조약이 성공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1999년 12월 열린 파나마 운하 반환식에서 미국을 대표해 참석한 건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미국이 파나마 운하 관할권을 파나마에 넘기는 반환식이 1999년 12월 14일 파나마시티에서 열렸다. 반환식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이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 미레야 모스코소 파나마 대통령,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에르네스토 세디요 멕시코 대통령의 모습. 동아일보DB
뒷마당에 누가 얼쩡거린다?
그럼, 트럼프 대통령은 왜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 잊혔던 파나마 운하 얘기를 다시 꺼낼까요. 일단 국내 정치적인 목적은 뻔히 보입니다. ‘미국이 만든 운하를 되찾자’는 구호가 레이건 시절의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보수층에 어필하는 효과가 있죠.
그리고 미국 경제에 있어서 파나마 운하의 중요성이 다시 커졌습니다. 셰일혁명 영향인데요. 2016년 파나마 운하가 확장공사를 마쳤고요. 이후 여기로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이 통과할 수 있게 된 거죠. 이제 파나마 운하는 미국 걸프해안에서 한국·중국·일본으로 향하는 LNG 수출의 핵심 통로입니다. LNG 생산·수출 확대로 미국을 더 부유하게 만들겠다는 트럼프의 약속을 실현하는 데 있어 역할이 한층 커진 거죠.
2018년 12월 파나마를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바렐라 당시 파나마 대통령과 파나마 운하를 방문한 모습. 중국선주협회 홈페이지그런데 미국이 다시 들여다봤더니, 아뿔싸. 자기네 뒷마당인 줄로 알았던 파나마에서 중국이 엄청나게 세력을 넓혀온 걸 뒤늦게 알아차린 겁니다. 미국이 소홀한 틈을 타서 중국이 이 지역을 파고들었는데요.
2017년 파나마는 카리브해 국가 중엔 선도적으로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었고요. 2018년엔 중국 ‘일대일로(一带一路)’ 이니셔티브에 참여한 최초의 라틴아메리카 국가가 됐습니다. 중국의 라틴아메리카 진출에 있어 관문 역할을 톡톡히 한 거죠.
일대일로는 중국 시진핑 주석이 10여 년 전부터 강력하게 추진 중인 ‘21세기 실크로드’ 구축 프로젝트입니다. 주로 다른 나라에 중국이 자금을 빌려주고 인프라 건설을 중국 기업이 맡아서 하는 방식인데요. 지난 몇 년 동안 파나마엔 중국 국영기업이 건설한 대형 컨벤션 센터와 크루즈선 터미널이 들어섰고요. 운하를 가로지르는 대규모 다리도 중국기업이 건설 중입니다. 파나마의 전 외무장관 호르헤 에두아르도 리터는 파이낸셜타임스에 이렇게 말합니다. “냉전 이후 미국은 자기 뒷마당이라고 여긴 것(라틴아메리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중국이 들어왔습니다.”
2월 2일 파나마 운하를 시찰 중인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오른쪽에서 세 번째). AP 뉴시스마르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의 취임 후 첫 방문국은 파나마였습니다. 그는 2일 호세 라울 물리노 파나마 대통령을 만나 파나마 운하에 대한 중국 영향력을 줄이라고 요구했죠. 중국의 운하에 대한 과도한 영향력이 ‘중립 의무 위반’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경고한 건데요. 1977년 맺은 조약에 따르면 운하가 폐쇄될 위협이 있는 경우 미국은 무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 미국이 말하는 ‘운하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란 도대체 뭘까요. 가장 많이 꼽는 건 파나마 운하 양쪽 끝에 있는 두 항구입니다. 홍콩 부호 리카싱이 세운 기업 CK허치슨의 자회사 허치슨포트가 29년째 운영 중이죠. 참고로 허치슨포트는 24개국에서 53개 항구를 운영하는 글로벌 기업입니다.
허치슨포트는 1997년 처음 이 항구 입찰권을 따냈습니다. 당시 입찰에 참여한 미국 기업은 없었고, 미국에선 허치슨포트를 위협으로 보지 않았죠. 아직 홍콩은 영국령이었고요. 이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고 나서도 경계심은 없었습니다. 1990년대만 해도 중국은 위협적인 상대가 전혀 아니었고요. 무엇보다 리카싱은 한때 아시아 1위 부자였던 전설적인 기업인이고, 누구도 그가 중국 정부에 쉽게 휘둘릴 사람이라고 보지 않았으니까요.
홍콩 기업 허치슨포트가 운영하는 파나마의 크리스토발 항구. 파나마의 대서양쪽 끝에 위치한다. AP뉴시스하지만 2020년 홍콩에 강력한 국가보안법이 시행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홍콩을 포함한 중국 기업은 중국 정부의 정보수집이나 군사작전에 협조해야 한다는 법률을 적용받죠. 중국이 아니라 홍콩 기업이니까 문제없다는 말이 이제는 통하지 않게 된 겁니다.
그래서 지난달 열린 공청회에서 미국 공화당 의원들은 파나마 운하와 관련해 이런 시나리오를 제기합니다. 파나마의 허치슨포트에 중국 스파이나 군 간부가 숨어있다면? 만약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서 미군 출동을 막기 위해 파나마 운하 양쪽의 항구를 붕괴시켜 운하를 봉쇄해 버린다면? 건설 노동자로 위장한 중국 스파이가 파나마 운하 위에서 중국이 짓고 있는 다리를 무너뜨린다면?
물론 구체적 증거는 없고 소설 같은 얘기이긴 한데요.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걸 완전히 가능성 없는 망상으로 치부할 순 없습니다. 예전 같지 않은 홍콩의 상황이 이런 소설 같은 시나리오에 신빙성을 더하죠.
군사력 동원을 암시하는 “운하 탈환” 발언까지 서슴없이 하는 트럼프 대통령 기세 앞에 파나마 정부는 납작 엎드린 상황입니다. 파나마 대통령은 이미 중국 일대일로 이니셔티브에서 최대한 빨리 탈퇴하겠다고 미국에 약속했고요. 또 2047년까지인 허치슨포트와의 항구 운영 계약을 취소할 방법을 모색 중이란 보도도 나옵니다. 인구 450만명에 상비군도 없는 작은 나라로선 미국에 무력사용 빌미를 주는 건 어떻게든 피해야 하니까요.
물론 중국이 호락호락하게 물러설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지금 미국과 중국, 두 나라는 관세와 틱톡 등 풀어야 할 문제가 많죠. 아마 파나마 문제도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겁니다.
2월 2일 파나마 수도 파나마시티에서 열린 반미시위에서 시위대가 트럼프를 나치로 묘사한 깃발을 불태우고 있다. AP 뉴시스그런데요. 이렇게까지 파나마를 압박해서 중국과 떼어놓는다면 그게 과연 미국의 진정한 승리일까요. 트럼프 사진과 성조기를 불태우며 격렬하게 항의하는 파나마 반미 시위대 모습을 보면 회의가 듭니다. 미국에 대한 뿌리 깊은 적대감이 다시 활활 타오르고 있거든요. 반미정서가 깊어질수록 반사이익을 보는 건 결국 중국입니다. 중국은 상당히 장기전으로 보고 라틴아메리카에서 천천히 세를 키워가는 중이니까요.
미국 육군 전쟁대학의 에반 엘리스 교수는 DW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중국이 미국의 소프트파워를 무력화시킬 기회입니다. 이는 (중남미에서) 미국의 힘을 약화시키고 중국이 정치적, 상업적으로 더 많이 참여할 수 있게 만듭니다.”
왠지 나그네 옷을 누가 먼저 벗기는지 내기하는 ‘해와 바람’ 이솝우화가 떠오르는데요. 트럼프 대통령은 아마도 이번 게임에선 쉽게 이길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역사가 그를 승리자로 기록할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By.딥다이브
트럼프 대통령의 다른 도발(예-그린란드, 가자지구, 관세 관련)에 비해 파나마 운하에 관한 주장은 미국 내에선 꽤 호응을 받는 편입니다. ‘미국이 만들었으니 미국 것’이라는 단순한 논리가 상당히 설득력 있기 때문이죠. 거의 50년 전 레이건이 설파했던 주장이 여전히 대중에게 통한다는 점이 놀랍기도 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트럼프 대통령이 “파나마 운하를 되찾겠다”고 말하고, 루비오 국무장관은 파나마 대통령을 만나 “운하에 대한 중국 영향력을 줄이라”고 압박했습니다. 파나마 운하가 수십 년 만에 주요 뉴스로 떠올랐습니다.
-미국이 어리석게도 운하를 파나마에 선물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 레이건의 주장을 되풀이하지만, 따져보면 레이건조차 대통령이 된 뒤엔 파나마 운하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운하 양도가 당시로선 최선이었던 거죠.
-셰일혁명으로 미국은 다시 운하가 중요해졌고, 이젠 자기네 뒷마당에 중국이 진을 치고 있는 게 영 못마땅합니다. 2020년 국가보안법 시행 뒤 홍콩의 자율성이 훼손된 것도 미국의 경계심이 커진 이유이죠. 하지만 몽둥이 들고 압박하는 게 최선일까요. 이 지역의 반미정서는 커져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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