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소형 빌라도 月100만원 시대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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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 피해 1년의 그늘]
전용 40㎡이하 평균 월세 85만원… 전세사기 파문뒤 1년새 14% 급등
관리비 등 포함땐 月100만원 훌쩍… 청년 평균임금 40% 주거비로 써야

“빌라 전세는 못 믿겠어요. 다음 집을 구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회사원 박모 씨(35)는 최근 두 번 연속 전세사기를 당했다. 박 씨가 2022년에 거주했던 보증금 3억 원짜리 서울 양천구 빌라는 인근 수백 채를 차명으로 보유한 전세사기 일당의 물건이었다. 이후 강서구 화곡동으로 이사했지만 전세 만료인 올해 7월을 앞두고 집주인이 갑자기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겠다고 통보했다. 다행히 두 번 모두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전세금 보증보험에 가입한 상태였다. 보증금은 HUG에서 돌려받았지만, 빌라 전세에 대한 불신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박 씨는 “전세사기 사건이 알려진 뒤 강서구 일대 월세가 100만 원을 넘어섰다”며 “전세는 무섭고 월세를 가자니 주거비가 너무 부담된다”고 했다.

지난해 2월 28일 인천 미추홀구의 대형 전세사기 피해자 사망 사건을 계기로 같은 피해가 대대적으로 알려진 지 1년 만에 서울의 원룸 및 투룸 월세가 가파르게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관리비까지 더하면 서민 주거비가 월평균 100만 원을 넘어섰다. 전세사기로 ‘빌라 전세’ 기피 현상이 확산하면서 월세로 수요가 쏠렸기 때문이다.

26일 동아일보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3월부터 올해 2월까지 서울 전용 40m²(약 12평) 이하 빌라 평균 월세는 85만 원으로 나타났다. 전세사기 피해 확산 직전 1년간(2022년 3월∼지난해 2월)의 74만6000원 대비 13.9% 올랐다. 오피스텔 월세 역시 같은 기간 76만5000원에서 83만 원으로 8.5% 올랐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의 2021년 6월부터 올해 2월까지 서울 빌라·오피스텔 전월세 신규 계약 64만7965건을 분석한 결과다.

여기에 2022년 주거실태조사에 따른 연립주택(17만8000원)과 다세대주택(16만4000원)의 관리비, 가스·전기요금 등을 고려하면 서울 원·투룸 평균 주거비는 월 100만 원이 넘는다. 정부가 지난해 3월 발표한 ‘청년 삶 실태조사’에서 국내 청년(19∼34세)의 월평균 임금은 252만 원이었다. 임금의 40.0%를 주거비에만 쏟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60만원 월세 반지하뿐”… 12평이하 월세 1년새 29% 뛴 지역도


[전세사기 피해 1년의 그늘]서울 빌라-오피스텔 전월세 분석
소형주택 전세 기피에 월세 올라… 젊은층 선호 성동-영등포구 급등
5건 중 1건꼴 월세 100만원 넘어
공급 급감… 서민 주거비 부담 커져
16일 대학생 김인하 씨(24)가 서울 관악구 소재의 한 반지하 방을 보러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해당 집 보증금은 1000만 원, 월세는 50만 원이었다. 오승준 기자 ohmygod@donga.com
16일 대학생 김인하 씨(24)가 서울 관악구 소재의 한 반지하 방을 보러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해당 집 보증금은 1000만 원, 월세는 50만 원이었다. 오승준 기자 ohmygod@donga.com
16일 서울 관악구 지하철 2호선 봉천역 인근. 개학을 앞두고 방 구하기에 나선 대학생 김인하 씨(24)는 공인중개사무소 앞에 걸린 오피스텔 임대 광고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보증금 2000만 원, 월세 70만∼80만 원.’

예산 마지노선이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60만 원인 김 씨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보증금 1000만 원도 군대에서 든 적금을 깨고 아르바이트를 3곳이나 뛰어 마련한 돈이다. 김 씨는 “오피스텔은 힘들고 일단 상태 괜찮은 빌라를 찾아봐야 할 것 같다”며 공인중개업소 문을 열었다.

● 소형 빌라 밀집지역에서 더 많이 올라
‘살 만한 빌라’를 기대했던 김 씨는 매물을 소개받고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김 씨가 제시한 조건에 맞는 방은 반지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방문한 집은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50만 원의 반지하 방. 온라인 광고에선 관리비가 8만 원이었는데, 옆에 있던 집주인이 “공과금이 올라 10만 원은 받아야 한다”고 했다. 빌라촌 한복판에 있는 두 번째 반지하 방은 문을 열자 하수구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 안 창문은 키보다 훌쩍 높았고, 흔들거리는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졸졸졸’ 샜다. 보증금 500만 원, 월세 47만 원짜리 방은 아예 창문이 없었다.

이날 반지하 방만 4곳을 둘러본 김 씨는 결국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50만 원, 관리비 8만 원짜리 방을 계약했다. 침대를 하나 놓으면 성인 한두 명이 겨우 누울 만한 공간만 남는 좁은 방이었지만 그나마 신축 건물이었다. 김 씨는 “반지하였지만 여유 자금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계약했다”며 “월세가 더 오르면 학교 근처에선 살기 힘들 것 같다”며 한숨을 지었다.

사회 초년생과 대학생, 신혼부부 등의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하던 빌라 임대 시장이 전세사기로 초토화되면서 서민들의 고충도 커지고 있다. 물가 상승에 주거비 부담까지 날로 커지면서 서민의 생활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6일 본보 분석에 따르면 직장과 거리가 가까워 젊은 층이 선호하면서, 소형 빌라가 밀집한 지역에서 전세사기 이후 최근 1년간(지난해 3월∼올해 2월) 소형 빌라(전용면적 40㎡ 이하) 월세가 가파르게 올랐다. 전용 40㎡ 이하는 사회 초년생이나 대학생, 신혼부부가 주로 찾는 방 한두 개짜리 ‘원룸·투룸’이다.

서울 성동구는 이 기간 평균 월세가 89만8000원으로 전세사기 사건 직전 1년(2022년 3월∼지난해 2월) 대비 28.6% 올라 가장 큰 폭으로 뛰었다. 영등포구와 양천구도 각각 25.6%(19만5000원), 21.4%(14만 원) 급등했다. 대대적인 전세사기 사건이 터졌던 강서구도 평균 월세가 82만9000원으로 직전 1년 대비 18.2%(12만7000원) 올랐다.

● 빌라 전세 기피로 월세 급등세 이어질 듯
100만 원 이상의 고가 월세 비중도 커졌다. 최근 1년간 서울 전용 40㎡ 이하 빌라 월세 거래 4만4427건 중 100만 원 이상인 경우는 8121건(18.3%)이었다. 서울 소형 빌라 5건 중 1건은 월세가 100만 원을 넘는다는 의미다. 강서구 화곡동 빌라촌 인근 공인중개사무소는 “전용 30㎡(약 9평) 이하 빌라 중 월세만 100만 원이 넘는 매물도 꽤 있고 관리비까지 더하면 부담이 더 커진다”며 “그래도 아파트보다는 주거비 부담이 덜하니 수요는 계속 있다”고 했다. 강남구와 서초구의 소형 빌라는 전체 월세 평균이 100만 원을 넘어섰다.

월세가 급등하며 이사를 미루거나 포기하는 세입자도 나온다. 노원구에서 부모님과 사는 직장인 이모 씨(36)는 최근 회사를 옮기며 오피스텔을 알아보다가 이사를 포기했다. 성동구 등에서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60만 원 정도를 예상했는데 살 만한 집은 대부분 월세를 20만∼30만 원은 더 줘야 구할 수 있었기 때문. 집에선 출퇴근에만 하루 2시간 이상 걸리지만 결국 조건에 맞는 방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 씨는 “관리비까지 생각하면 100만 원은 나갈 텐데 그러면 저축을 못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빌라 기피 현상에 부동산 경기 침체 등이 겹치며 수도권의 빌라·오피스텔 공급이 급감한 상태여서 월세 급등세가 앞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송인호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정보센터 소장은 “전세사기 영향으로 앞으로 빌라 월세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공급은 안 되는 상황”이라며 “월세 세액 공제율을 높여주는 등 서민 주거비 경감을 위한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정된 예산으로 집을 구하기가 점차 어려워지다 보니 세입자들은 ‘을(乙)’이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매물에 대해 보다 꼼꼼하게 따지기 어려워지고, 미리 확인해야 할 정보마저도 모른 채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 김 씨에게 반지하 빌라들을 보여준 중개인은 공인중개사가 아닌 중개보조원이었다. 공인중개사법상 중개보조원은 계약을 중개할 수 없고, 단순 매물 소개 등만 할 수 있다. 이 보조원은 “당장 계약 안 하면 다른 사람이 채갈 수 있으니 가계약금 200만 원부터 보내라”고 재촉했고 본인이 중개보조원이라는 사실은 계약 직전에야 밝혔다.

또 김 씨가 계약한 집은 주인 1명이 주택 전체를 소유한 다가구주택이었지만 공인중개업소에선 선순위 보증금 규모나 주택 가액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다가구주택이 경매로 넘어가면 먼저 입주한 세입자의 권리가 우선한다. 김 씨는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원하는 가격에 집을 구할 수 없으니 일단 계약한 것”이라고 했다.


최동수 기자 firefly@donga.com
김형민 기자 kalssam35@donga.com
오승준 기자 ohmygod@donga.com
이축복 기자 bless@donga.com
#서울#전세사기 파문#월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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