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병으로 취하다’[손진호의 지금 우리말글]

손진호 어문기자 입력 2021-05-30 09:00수정 2021-05-3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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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행정중심복합도시 전경. 동아DB
무슨 전쟁놀이인 줄 알았다. 특공, 특공 하길래…. 알고 보니 관세청 산하 관세평가분류원 공무원들이 철밥통으로도 모자라 ‘특별공급’ 아파트를 분양받았다는 얘기다. 이들은 세종시 이전 대상이 아닌데도 청사를 짓고, 수억 원씩 시세차익을 얻었단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보며 내 집 장만의 꿈을 포기하다시피 한 사람들의 심경은 어땠을까. 말 많고 탈 많던 특공이 폐지된다지만, 오늘도 화병(火病)을 내리려 ‘억병으로 취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억병’은 한량없이 많은 술 또는 그렇게 마셔서 고주망태가 된 상태를 말한다. 고주망태는 ‘지금’ 술에 몹시 취해 있는 상태나 그런 사람을 뜻한다. 고주망태의 ‘주’를 ‘술 주(酒)’로 지레짐작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고주’는 옛말 ‘고조’가 변한 말로 ‘술, 기름 따위를 짜서 밭는 틀’을 말한다. 망태는 망태기의 준말. 술을 거르는 망태기는 언제나 술에 절어 있기에 고주망태란 말이 나왔다.

술은 인간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 보다. 그래서 온갖 시름을 잊게 해준다며 망우물(忘憂物)이라고도 하고, 좋은 약 중에서도 으뜸이라 해서 백약지장(百藥之長)이라고도 한다. 단, 한 가지 조건은 붙는다. ‘사람이 술을 마실 때’여야 한다.

술 세계엔 수많은 사연만큼이나 표현도 넘쳐난다. 그중 술에 취한 술꾼의 모습을 나타내는 낱말들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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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닥사그리하다’란 말을 아시는지. ‘술이 얼근하게 취하여 거나하다’는 뜻이다. 술에 취해 한창 기분이 좋은 술꾼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어릴 때 5일장에 다녀온 아버지의 얼굴이 꼭 그랬다. 하지만 이 낱말, 정감 있고 말맛도 좋지만 여태껏 인터넷 웹사전인 우리말샘에 머물러 있다.

술에 취하는 첫 단계는 ‘우럭우럭하다’가 아닐까 싶다. 술기운이 차츰 얼굴에 나타나는 모습을 가리킨다. 모처럼 술을 마실 때일수록 술기운이 우럭우럭하며 알딸딸하게 취하는 기분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얼큰하다’도 재미있다. 술과 해장국이 찰떡궁합임을 보여주는 낱말이다. 무슨 소리냐고? ‘매워서 입안이 조금 얼얼하다’, ‘술에 취해 정신이 조금 어렴풋하다’는 뜻풀이에 주목해보라. 술을 얼큰하게 마시고 난 뒤 얼큰한 해장국으로 속을 푸는 주당들에게서 해답을 쉬이 얻을 수 있다.

기분이 좋아지니 술술 술이 들어간다. 어느새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술에 취해 몸을 가눌 수가 없다. ‘곤드레만드레’ 상태다. 이때쯤이면 술이 슬슬 사람을 마시거나 술에 먹힌 상태다.

에라, 모르겠다. 한잔 더. 이후는 ‘곤드라진다’. ‘곤드라지다’는 술에 취해 정신없이 쓰러져 자는 것을 말하는데, ‘곯아떨어지다’와 같은 뜻이다.

한데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고 했던가. 술을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고 정신이 말짱한 상태는 ‘맨송맨송하다’고 한다. 그야말로 집안 대대로 술을 잘 마시는 ‘부줏술’이다. 밀밭만 지나가도 크게 취하는 사람들로선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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