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신용카드 한 장이었죠”… 두 번의 신용불량자 ‘악몽’ 벗고 일어선 39세 물리치료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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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은 카드가 내 인생의 잘못 끼워진 첫 단추인 건 한참 뒤에야 알게 됐죠.”

사인 한 번으로 발급받은 신용카드 한 장은 21세였던 김민주 (가명·39) 씨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김 씨의 카드는 발급과 동시에 남자친구가 가져갔고 3년 뒤 본인이 쓰지도 않은 4000만 원의 빚으로 돌아왔다. 안 먹고 안 쓰며 지독하게 돈을 모아 빚을 갚았다. 그 후로는 행복한 일만 있기를 소망했지만, 전남편의 도박 빚으로 김 씨는 또다시 빚의 굴레에 빠지게 됐다. 야반도주, 이혼, 쉼터 생활…. 아이 둘을 혼자 키우며 또 이를 악물었다. 올해 8월. 그녀는 18년간 그녀의 발목을 잡아 왔던 모든 빚을 털어냈다.

24일 경기 동두천시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김 씨는 끝이 보이지 않는 채권 추심과 채무 상환의 ‘도돌이표’를 그리며 20, 30대를 보냈다고 말했다. 김 씨는 남들은 보통 평생 한 번도 겪지 않는 금융채무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 신세를 두 번이나 경험했다.

그녀는 모든 빚을 상환한 올해 8월, 자신의 사연을 적어 신용회복위원회가 주최하는 수기 공모에 도전했다. 지난달 최종 심사 결과, 그녀는 711명의 공모자 중 가장 높은 대상을 받았다. 김 씨는 “다른 이들이 나같이 잘못된 길을 걷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내 이야기를 썼다”고 했다.

○ 신용카드 한 장에 나락으로 빠진 꽃다운 시절

2001년 김 씨는 남자친구와 길거리를 걷다가 ‘신용카드를 발급받으면 생필품을 준다’는 영업사원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별다른 생각 없이 본인 명의의 신용카드 한 장을 발급받았다. 당시는 카드사가 상환 능력을 심사도 하지 않고 신용카드를 ‘묻지마 발급’하던 때였다. 이런 관행은 2003년 금융채무불이행자 380만 명이 양산된 ‘카드 대란’의 원인이 됐다.

카드는 발급되자마자 남자친구 손에 들어갔다. 남자친구가 사업자금으로 급하게 쓸 일이 있다며 잠시 빌려달라고 했다. 남자친구는 김 씨의 카드로 갖가지 사치품을 사들였고 카드 값은 감당 못 할 정도로 불어났다. 그녀는 추심을 피하고자 급한 대로 다른 카드를 발급받아 빚을 돌려 막았다. 한 장이었던 카드는 어느새 5장이 됐다. 더 이상 카드 발급이 되지 않자 남자친구는 그녀 손을 끌고 대부업체를 찾아갔다. 그러고는 김 씨 이름으로만 세 곳에서 연 40%대 고금리 대출을 받았다. 김 씨는 “당시 대부업체 직원까지 내 사정을 걱정해 줬다”라고 회상했다.

빚을 갚겠다던 남자친구는 그녀에게 4000만 원의 채무를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그 사이 대부업체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고 집과 학교로 찾아와 욕설을 해대며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김 씨는 당시 생긴 트라우마 때문에 지금도 휴대전화를 진동으로 해놓는다. 김 씨는 “전화벨이 울리면 심장이 울렁거린다”고 했다.

20대 초반이었던 김 씨에게 4000만 원은 감당할 수 없는 짐이었다. 지독한 추심에도 어렵게 물리치료사 자격증을 땄지만, 신용불량 딱지로 취업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지인을 통해 신용회복위원회(신복위) 존재를 알게 됐고 도움을 받기로 했다. 김 씨는 “그때는 하루 빨리 빚을 갚아 정상적인 생활을 되찾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고 했다.

김 씨는 신복위를 통해 4000만 원이었던 빚을 3000만 원으로 감면받을 수 있었고 매달 35만 원씩 8년간 갚아나가기로 했다. 당시 김 씨의 월급은 140만 원. 이 중 35만 원을 빚 갚는 데 쓰고 50만 원은 저축했다. 한창 꾸미고 싶을 25세의 나이에 안 쓰고 안 먹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빚을 갚는 기간에는 신발 두 켤레로 버텼고 2만 원이 넘는 옷은 사지 않았다. 숙소도 직장에서 마련해준 곳을 이용해 주거비를 아꼈다. 남들이 버린 책상과 거울까지 주워다 썼다.

고작 스키장 한 번 간 것이 그녀가 20대에 누린 유일한 사치였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다 고기 냄새에 이끌려 식당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 적도 있다. 식당 안에서 지글지글 구워진 고기를 맛있게 먹는 사람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집으로 돌아가 혼자 김치찌개를 끓여 먹으며 한참을 울었다.

그런 힘든 시절을 잘 이겨낸 덕분에 약속했던 상환 기일보다 4년 일찍 빚을 갚을 수 있었다. 김 씨는 남자친구에 대한 배신감과 불법 추심에 따른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렸다. 김 씨는 “모든 빚을 상환하던 날, 매일 꾸던 악몽도 없이 아주 깊은 잠을 잤다”고 했다.

○ 처음보다 힘들었던 두 번째 시련

빚을 모두 상환해 정상적인 생활을 하던 김 씨는 지인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났고 연애 1년 만에 결혼했다. 결혼과 동시에 아이가 생겼고 행복한 생활을 꿈꿨다.

하지만 김 씨의 소망과 다르게 남편은 폭력과 도박으로 김 씨를 점점 힘들게 했다. 넘쳐나는 도박 빚을 감당할 수 없게 된 남편은 김 씨에게 고금리 대출을 종용했다. 텔레비전에선 대부업체 광고가 넘쳐났고 전화 한 통으로 신용조회 없이 300만 원 넘게 대출이 되던 때였다. 김 씨는 “둘째를 임신하고 만삭이었을 때 직장에서 일하는 도중 남편이 전화를 걸어 대출을 받으라고 독촉했다. 도로를 달리는 트럭을 보며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었다”고 말했다.

김 씨 부부는 빚 독촉을 피해 두어 달 여관방을 전전하기도 했다. 정말 이쯤에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지만, 그때마다 아무것도 모르고 옆에서 놀고 있는 두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후 김 씨는 남편에게서 벗어나 가정폭력지원센터에서 아이들과 한동안 지내며 어렵게 이혼했다. 그녀 앞에는 또다시 약 4000만 원의 빚이 남겨졌고 신복위를 통해 인생 두 번째 채무조정이 시작됐다.

두 번째 상환은 첫 번째보다 더 어려웠다. 두 명의 아이까지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빚을 갚는 동안 아이들에게 장난감과 옷 한번 제대로 사주지 못했다. 돌을 갓 지난 둘째 아이 분유값마저 없어 복지시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계속된 직장 일과 아이들 양육 때문에 부업으로 다른 일을 할 수도 없었다. 김 씨는 얼마 안 되는 월급에서 35만 원씩을 매달 상환하고 20만 원을 저축했다. 안 먹고 안 쓰는 지독한 고통의 세월이 또 시작된 것이다.

임시로 생활했던 가정폭력 쉼터도 허락된 기간인 9개월을 거의 다 채워갔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다행히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임대주택을 알게 됐고 보증금 500만 원을 또 다른 복지기관의 도움을 받아 마련할 수 있었다.

지금 그 임대주택에서 살고 있는 김 씨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밖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고기 한번 제대로 못 사준 것이 지금도 한스럽다. 김 씨는 “가정 폭력을 겪고 자란 첫째는 한동안 잘 웃지도 않았다”며 “그래도 이 정도나마 밝게 자라준 아이들에게 그저 고마울 뿐”이라고 했다.

○ “아이들에게 튼튼한 나무 같은 존재 되고 싶어”

아이들과 함께한 고통의 세월은 5년 만에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 그녀는 이번에도 악착같이 모았고 약속한 기간보다 3년 빨리 모든 빚을 상환했다. 올해 8월을 끝으로 지긋지긋했던 빚의 굴레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녀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가 아닌, 시련을 잘 견디고 튼튼한 굴참나무 같은 존재가 돼 아이들이 엄마의 그늘에서 편히 쉬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잘못된 채무로 인해 고통받았던 젊은 시절을 교훈 삼아 다시는 빚의 굴레에 빠지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김 씨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이 생겼을 때 그것을 돌려막기 위해 대출을 받을 생각보다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을 먼저 알아보라는 것이다. 김 씨는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도 길이 있었다. 바닥을 치면 올라가듯, 포기하지 말고 주변의 도움을 찾아 손을 뻗어야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형민 기자 kalssam35@donga.com
#신용카드#금융채무불이행자#신용회복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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