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여행의 멋진 동반자 ‘그랜드 투어링 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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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청희의 젠틀맨 드라이버

메르세데스벤츠의 명차 ‘300 SL 로드스터’는 경주차 기술을 바탕으로 만든 당대 전형적 그랜드 투어러(GT) 중 하나였다. 메르세데스벤츠 제공
메르세데스벤츠의 명차 ‘300 SL 로드스터’는 경주차 기술을 바탕으로 만든 당대 전형적 그랜드 투어러(GT) 중 하나였다. 메르세데스벤츠 제공
따가운 햇빛과 습한 공기에 가만히 있어도 지치기 일쑤인 계절, 여름이 시작됐다. 다른 계절도 아닌 여름에 회사들의 휴가가 집중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날씨 탓이 크다. 회사의 여름철 냉방 관련 관리비 부담도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여름철 휴가에 더위를 피한다는 뜻의 ‘피서(避暑)’라는 표현을 곧잘 쓰는 것처럼 무엇보다도 날씨가 사람을 견디기 어렵게 만든다. 우리에게 여름은 더위를 피해 쉬거나 여행을 떠나는 계절이기도 하다.

요즘은 휴가 기간에 집에 머물거나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아직 많은 사람이 쉴 만한 곳, 즐기기 좋은 곳을 찾아 직접 차를 몰고 나서곤 한다. 집이나 직장에서 가까운 곳이라면 모를까 땡볕 아래 차를 몰고 길을 떠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피곤한 일이다.

물론 우리나라가 아직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달려봐야 직선거리로 500km가 넘지 않는 작은 땅덩어리이긴 해도 변화무쌍한 도로 환경은 시간과 체력 소비를 키우기 마련. 그런 환경에 더위까지 합세하면 선뜻 차로 여행을 떠나기가 부담스러운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직접 운전해서 떠나는 여행, 그것도 여름에 떠나는 여행에 쓸 차라면 편안하면 편안할수록 좋다. 먼 길을 편안하게 달리며 여행하기에 딱 알맞은 장르의 차가 바로 ‘그랜드 투어링 카(Grand Touring car)’ 또는 ‘그랜드 투어러(Grand Tourer)’다.

흔히 머리글자를 따 GT라고 불리는 그랜드 투어링 카 또는 그랜드 투어러라는 자동차 장르를 간단히 설명하면 장거리를 편안하고 빨리 달릴 수 있는 스포츠카 성격의 럭셔리 승용차다.

GT라는 이름의 어원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자동차 역사 초기에 인기 있던 투어링 카(Touring Car)가 그중 하나다. 투어링 카는 네다섯 사람이 편안히 탈 수 있으면서 지붕이 없거나 지붕을 씌우고 벗길 수 있는 차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요즘 기준으로는 일반 승용차에 해당하는 구성과 개념인데, 1930년대 들어 이를 한층 더 크고 호화롭게 꾸민 차들이 등장했다. 당시에는 그런 차들을 가리켜 그랜드 투어링 카라고 부르는 일은 흔치 않았지만, 일반 승용차와 구분되어 별개의 장르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GT라는 장르의 성격이 자리를 잡는 데에는 다른 배경이 더 큰 영향을 주었다. 철도 발달 이전인 근대에 유럽 청년 귀족들이 관례적으로 떠났던 여행인 그랜드 투어(Grand tour)가 바로 그것이다.

17, 18세기에 걸쳐 북유럽과 영국을 중심으로 청년 귀족과 상류층 자제들은 유럽 본토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의 명소와 중심지를 둘러보며 문화, 예술, 정치 등을 배우는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런 여행을 가리켜 그랜드 투어라고 한다. 그랜드 투어는 유명한 영국 자동차 버라이어티 TV 프로그램 ‘톱 기어(Top Gear)’ 제작진과 출연진이 독립해 온라인 쇼핑 사이트인 아마존과 손잡고 새로 만든 온라인 TV 프로그램 제목으로도 쓰일 만큼 잘 알려진 표현이다.

그랜드 투어는 상류층이라면 한번쯤 다녀와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나 다름없었다. 여행에는 당연히 타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걸맞게 크고 편안하며 화려한 마차가 동원됐다. 당시 유럽에서는 마차가 곧 신분의 상징이면서 사교의 수단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랜드 투어에 쓰는 마차를 그랜드 투어러라고 부르면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상류층의 여행용 마차였던 그랜드 투어러는 자동차 시대로 넘어오며 모터스포츠와 만나 새로운 성격을 얻게 된다. 태동기 자동차는 기술적인 한계와 미숙함 때문에 자동차로 더 빨리, 더 멀리 가는 것은 그 자체가 모험과 도전이었다. 그런 특성은 부유층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자연스럽게 도로 위에서 펼쳐지는 속도와 거리의 경쟁은 모터스포츠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연재 초기에 썼듯 귀족과 부유층이 직접 차를 사서 모터스포츠에 출전하면서 젠틀맨 드라이버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시간이 흘러 젠틀맨 드라이버 또는 젠틀맨 레이서들이 평소에는 일상생활에 쓰다가도 주말에는 경주에 출전할 수 있는 고성능 고급 스포츠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유럽 여러 곳에서 열리는 경주에 자신의 차를 몰고 출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차 시대의 그랜드 투어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 그런 차들 역시 그랜드 투어러 즉 GT라는 별명을 얻었고 당장 경주에 출전해도 손색없을 만큼 뛰어난 성능을 내면서도 어느 곳이든 빠르고 편안하게 갈 수 있는 럭셔리 스포츠카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페라리 812 수퍼패스트는 현재 페라리가 만드는 가장 화려한 GT다. 페라리 제공
페라리 812 수퍼패스트는 현재 페라리가 만드는 가장 화려한 GT다. 페라리 제공
원래 의미를 생각하면 현대적 GT도 기본적으로는 럭셔리카의 범주에 속한다. 요즘은 대중차 브랜드도 GT라는 이름을 스포티한 성격의 차에 흔히 붙이지만 이는 원래 GT의 속성을 마케팅 차원에서 빌리거나 응용한 것이다.

특히 같은 뜻의 이탈리아어 표현인 그란 투리스모(Gran Turismo)는 현대적 GT 개념이 등장할 무렵에 이탈리아 회사들이 내놓은 차들이 인기를 얻으며 더욱 널리 쓰이게 됐다. 1930년대 란치아와 알파 로메오, 1950년대 마세라티와 페라리 등이 내놓은 여러 GT는 그들이 모터스포츠 활동에서 거둔 성과와 더불어 GT라는 장르가 뚜렷하게 돋보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영국의 벤틀리와 애스턴마틴 역시 비슷한 시기에 멋지고 성능이 뛰어난 GT로 명성을 얻었다.

1960년대 이후로 오랫동안 GT는 대부분 대형 고성능 럭셔리 2도어 쿠페나 컨버터블 형태로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럭셔리 또는 프리미엄 브랜드 소비자들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와 맞물려 크로스오버 개념의 GT가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4도어 쿠페라고 부르는, 쿠페의 날렵하고 스포티한 스타일에 4도어 세단의 뒷좌석 승하차 편의성과 실내 및 적재공간을 결합한 차들이 GT의 영역을 파고든 것이다.

메르세데스벤츠 CLS-클래스, BMW GT, 아우디 A7 등 프리미엄 브랜드 차들은 물론이고, 포르쉐 파나메라, 애스턴마틴 라피드 등 한층 더 스포츠 성향이 두드러지는 모델들도 GT의 장르 파괴에 동참했다. 시야를 넓히면 롤스로이스 컬리넌, 벤틀리 벤테이가 등 럭셔리 카 브랜드들이 내놓는 호화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나 람보르기니 우르스, 마세라티 르반떼 등 스포츠카 브랜드의 고성능 SUV도 이와 같은 크로스오버 GT 개념이 확장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전통적인 정통파 GT들은 꾸준히 명맥을 잇고 있다. 롤스로이스 레이스와 던, 벤틀리 컨티넨털 GT, 페라리 812 슈퍼패스트, 마세라티 그란 투리스모와 그란 카브리오 등은 정통파 GT의 대표 모델이라 할 수 있다.

GT라는 장르가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그와 같은 모델들을 떠올리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기준이 달라져 경계가 모호해지더라도 먼 여행길도 편안하고 빠르고 우아하게 함께할 수 있는 차라는 GT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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