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활의 시장과 자유]‘1등’도 휘청거리는 격랑의 시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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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활 논설위원
권순활 논설위원
 서울 종로1가의 KEB하나은행 서린지점은 원래 외환은행 지점이었다. 지난해 9월 하나은행에 통합된 뒤 지점명이 바뀌었다. 외환은행의 흔적은 간판 한쪽의 외환전문은행이란 말에 남아있는 정도다.

 외환은행은 산업화 시대 서독으로 간 광부와 간호원들의 모국 송금계좌 개설을 전담한 은행권의 명가(名家)였다. 명문대 출신이 즐비한 직원들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이 은행이 단자회사인 한국투자금융에서 출발한 하나은행에 넘어간 것은 ‘고래가 새우에게 먹힌 셈’이었다.

삼성-현대차까지 흔들리나

 대우증권은 1990년대 초만 해도 증권업계 부동의 1위였다. 그런 대우증권이 당시 중견 증권사 지점장이었던 박현주 씨가 세운 미래에셋증권에 작년 말 인수됐다. 외환은행과 대우증권의 ‘몰락’을 생각할 때마다 세월의 무상함과 함께 영원한 강자(强者)로 남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한다.

 며칠 전 현장기자 시절 인연을 맺은 전직 장차관 몇 분을 만났다. 요즘 ‘밥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화제인 속칭 김영란법에서 시작한 대화는 송민순 회고록 파문을 거쳐 먹구름이 커지는 경제에 대한 우려로 이어졌다.

 한 참석자가 ‘1등도 휘청거리는 현실’이 무엇보다 걱정이라고 하자 모두 공감했다. 최근 대형 악재가 불거진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는 한국의 빅2 기업이면서 전자와 자동차의 압도적 1등 기업이다. 유통 1위 롯데, 조선 1위 현대중공업, 철강 1위 포스코 사정도 어렵다. 파산 위기에 놓인 해운 1위 한진해운은 말할 것도 없다. 1997년 외환위기 때 경험했지만 경영난으로 기업 부실이 커지면 그들과 거래하는 금융회사는 물론 국민도 피멍이 든다.

 나는 2014년 3월 ‘삼성-현대차가 흔들리는 날’이라는 칼럼에서 당시 실적 동반악화라는 이상 기류가 나타난 두 회사가 본격적으로 흔들릴 때의 충격이 핀란드의 ‘노키아 쇼크’ 못지않을 것이라고 썼다. 지금 우리 기업과 경제가 처한 상황은 2년 7개월 전 우려했던 것보다 심각하다. 삼성을 비롯한 주력산업 대표주자들이 일제히 휘청거리는 현실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경제가 벼랑으로 치닫는데 돌파구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지만 산업대국의 기적을 일군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 박태준 구인회 최종현 같은 통찰력과 추진력을 갖춘 ‘거인(巨人)’들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정치는 경제에 도움은커녕 발목만 잡는 역기능이 두드러진 지 오래고 갈수록 폐해가 심해진다. 명(名)경제부총리로 기억되는 장기영 김학렬 남덕우처럼 온몸을 바쳐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기는 장관도 드물다. 고생을 모르고 자란 대기업 오너 3, 4세들이 창업과 수성(守成), 도약을 이룬 1, 2세들에게 버금가는 기업가 정신과 경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아직은 물음표다.

이대로 벼랑으로 갈 건가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인들이 우리 역사상 최고 수준의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기업 성장에 따른 직간접적 파급 효과 덕분이었다. 지금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새로운 기업은 나오지 못하는데 그나마 있던 기존의 ‘업계 1등’마저 휘청거리는 격랑과 위기의 시대다.

 기업 활동의 1차 당사자인 기업인과 노조, 법안과 정책을 통해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부와 정치권은 엄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상황을 개선할 행동에 즉각 나서길 바란다. 캄캄한 터널로 이미 들어갔는데도 계속 허송세월만 하거나 ‘눈앞의 이익’에 매몰돼 난국을 부채질한다면 한국 경제의 침몰과 한국인의 총체적 빈곤화라는 파국의 시간이 앞당겨질 것이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대우증권#삼성#현대차#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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