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건혁]익명에 숨은 전문가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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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혁 경제부 기자
이건혁 경제부 기자
“살려 주세요.”

지난달 말 한 증권사의 팀장급 애널리스트에게 한진해운에 대한 코멘트를 부탁하자 이 같은 즉답이 돌아왔다. “한진해운을 살려 달라는 뜻이냐”는 농 섞인 기자의 추가 질문에 그는 “제가 의견을 내면 여기저기서 귀찮게 한다”며 “저를 제외시켜 달라”고 말했다. “익명을 보장해 주겠다”는 기자의 제안에도 한참을 머뭇대던 그는 몇 차례 ‘이름이 드러나선 안 된다’는 다짐과 함께 한진해운과 해운업의 운명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펼쳐 놨다.

국내 전문가들이 언론의 취재에 응하면서 익명을 요구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자신이 발표한 연구논문이나 분석 보고서 등과 관련한 내용을 확인하는 요청에도 익명을 요구하는 전문가도 있다. 때로는 “시간이 지나 연구 내용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거나 “지금은 해당 내용을 연구하지 않는다”는 변명을 앞세워 실명 노출을 거절한다.

이 밖에 익명을 요구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때로는 남들의 주목을 받는 게 부담스러운 소심한 성격이나 자신의 학문적 성과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는 전문가적 자존심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전문성을 무시한 채 정해진 답변만 요구하는 분위기에 자포자기 심정으로 익명을 요구하는 일도 있다. 한 민간 연구기관 연구원은 “윗분들이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너는 대답만 하면 돼) 태도를 갖고 있는데 굳이 이름을 걸고 의견을 제시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는 익명을 요구하는 이유가 이름이 공개됐을 때 뒤따라올 책임 추궁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국내 중소형 증권사의 리서치센터장은 “실명으로 의견이 소개될 때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했느냐’며 꼬치꼬치 따지는 일이 적잖다”며 “특히 정부나 금융 당국의 구상과 다른 언급을 할 경우 해당 실무자들의 질책성 항의가 많아 업무를 보기 어려울 정도”라고 귀띔했다. 또 다른 민간 연구소의 관계자는 “국내에선 의견을 모으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다른 목소리를 발본색원(拔本塞源)하려는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어 전문가들이 소신 있는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고 말할 정도다.

일각에서는 ‘사공이 여럿이면 배가 산으로 간다’며 다양한 의견 개진이 사태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위기 때에는 각자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보다 선장의 결정 사항을 따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현대 경제의 특징 중 하나가 복잡성이다.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난마처럼 여러 가지가 얽히고설켜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 한두 사람의 능력만으로 해결할 만한 일이 많지 않다. 경험이 많은 선장도 방향을 잘못 잡을 수 있는 시대다.

따라서 지금은 ‘무조건 돌격 앞으로’라는 선장의 구호를 앵무새처럼 따라 하기보다는 ‘지금 배가 산으로 갈 수도 있다’고 말해 줄 선원이 더 요구된다. 이 역할을 맡아야 할 전문가들이 책임 추궁이 두려워 의견 제시를 피하고, 익명에 숨으려 한다면 대한민국의 앞날은 결코 밝지 않다.
 
이건혁 경제부 기자 gun@donga.com
#한진해운#전문가#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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