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2030, 유난히 추운 이 겨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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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퇴 내몰리는 2030세대]―희망없는 희망퇴직
명퇴 벼랑 내몰리는 청춘들

“동생처럼, 아들처럼 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28세 박민형(가명) 씨가 퇴직 인사를 하며 사무실을 한 바퀴 돌았다. 박 씨의 눈을 애써 외면하던 여사원 한 명이 울기 시작했다. 울음은 전염병처럼 번지더니 50대 남성 부장도 눈물을 흘렸다. 부장은 연신 “미안하다”고 말했다.

박 씨는 2012년 말 인천에 있는 한 대기업에 연구직으로 입사했다. 입사 후 인천에서 집을 구해 새로운 고향으로 삼았다. 그런데 지난달 갑자기 회사 인사팀이 경남 창원의 다른 계열사로 전직하도록 권고했다. “싫다”고 버텼더니 한 임원(상무급)이 자신의 방으로 오라고 했다. “회사 경영 상황이 무척 어렵다. 네가 안 나가면 너의 상사 중에 누가 나가야 한다. 너는 아직 20대고 가족이 없으니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 잘 한번 생각해 보라.” 박 씨는 결국 이달 8일 퇴직원을 제출했다.

인력 구조조정이 최근 재계의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다. 분위기는 마치 1997년 외환위기 직후와 비슷하다. 당시는 주로 인건비 부담이 큰 부장급 이상이 희망퇴직을 당했지만 지금은 신입사원과 대리까지로 연령대가 떨어졌다. 3분기(7∼9월) 기준 실업급여 신청자 중 20대와 30대가 41%를 차지했다. 사상 초유의 ‘2030 명퇴’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30대 그룹의 한 부사장은 “더 이상 자를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내년 정년 연장 시행을 앞두고 올해 재계 인사팀은 50대 간부 직원들을 최대한 솎아 냈다. 간부급 중에선 더 자를 사람이 없다 보니 구조조정의 화살이 점차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4대 그룹의 전무급 간부는 “내년뿐 아니라 후년 경기 전망도 어둡다. 외환위기보다 더 큰 충격이 올 수도 있어 전방위로 비용을 줄이고 있다. 상시적으로 희망퇴직을 받고 있고, 대상은 신입사원을 포함한 전 직원”이라고 말했다.

유난히 바람이 매서웠던 16일, 서울 강남구의 한 고깃집에서 대기업 마케팅팀 소속 직원 10여 명이 모여 송년회를 했다. 돌아가며 재치 있는 건배사를 외치며 호기롭게 폭탄주를 들이켰다.

그중 한 명이 “상무 2년 차에 잘린 그 선배 뭐하지”라고 한마디 내뱉자 갑자기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이 자리에서는 “착한 사람일수록 더 빨리 잘린다”는 푸념까지 나왔다. 을씨년스러운 2015년이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다.


“너희 회사는 괜찮니?” 부모님 전화에 말도 못하고… ▼

17일 서울 중구 삼일대로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서울고용센터 실업급여과를 방문한 한 20대 여성이 창구에서 실업급여 수급 자격에 대한
 상담을 받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3분기(7∼9월) 실업급여를 신청한 20, 30대는 각각 전체의 16.7%, 
24.3%를 차지한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17일 서울 중구 삼일대로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서울고용센터 실업급여과를 방문한 한 20대 여성이 창구에서 실업급여 수급 자격에 대한 상담을 받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3분기(7∼9월) 실업급여를 신청한 20, 30대는 각각 전체의 16.7%, 24.3%를 차지한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20대 후반인 A 씨는 2013년 12월 두산인프라코어에 입사했다. 이달 초 회사는 전 사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공고를 냈다. 하지만 A 씨는 버텼다. 입사한 지 겨우 2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퇴직을 한단 말인가.

이 와중에 희망적인 뉴스를 신문에서 봤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신입사원에 대한 보호조치를 언급한 것이다. 자신도 살아남는 줄 알았다. 하지만 회사는 신입사원의 범주를 2014년 1월 이후 입사한 이들로 한정했다. 한 달 차로 자신은 구제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결국 A 씨는 최근 퇴직원을 제출했다. A 씨의 회사 동기 11명 중 9명이 희망퇴직했다. 동기 중 1명은 “못 나간다”고 버틴 끝에 같은 팀 과장급이 희망퇴직하면서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며칠 전 동기들끼리 술자리를 가졌다.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눈물이 쏟아졌다.

퇴직한 동기들은 대체로 공기업 입사나 7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했다. A 씨는 대학원을 알아봤다. 요즘 희망퇴직 후 공부하겠다고 나선 20, 30대 젊은이가 넘치면서 대학원 경쟁률이 치솟고 있었다. 지도교수를 만났더니 “대학원생 2명 뽑으려 하는 데 벌써 60명이 문의했다”고 말했다.

‘더 공부해 경쟁력을 높여도 국내에 갈 기업이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대학원을 졸업할 때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퇴직한 2030들이 대거 인력시장으로 몰려나오면 일자리 구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A 씨는 “아예 이민을 갈까 생각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A 씨는 부모님에게 퇴직 사실을 밝혔다. 하지만 동기 한 명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고 한다. 그 동기는 매일 PC방으로 출근한다. 부모님이 “너희 회사가 감원을 한다고 언론에 나오던데 너는 괜찮으냐”고 수시로 묻는다. 그때마다 그는 “별일 없다”고 둘러댔다.

A 씨는 “2년 지난 직원을 내보낼 거라면 도대체 신입사원을 왜 뽑는지 모르겠다. 뭔가 한국 고용시장이 구조적으로 잘못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소리 소문 없이 진행되는 구조조정

한 전자 대기업은 7월 일부 사업을 분사했다. 인사팀은 “분사 사업부에 일하던 직원들은 모두 분사된 회사로 적을 옮기든지 희망퇴직을 하라”고 권고했다. 입사 5년 차인 B 씨(29)는 이적 거부 의사를 밝혔다. 회사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아는 일류 대기업에 입사했지 중소기업에 일하러 온 게 아니라는 것이 B 씨의 거부 이유다. 그랬더니 인사팀은 “일단 분사된 회사에 파견을 가 1년 반 동안만 ‘지원업무’를 하라”고 권유했다.

월급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새로운 상사, 동료와 일해야 한다. 1년 반 후에 제대로 본사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돌아왔을 때 희망 부서로 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일 못해 파견 나갔던 사람’이란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

결국 B 씨는 희망퇴직을 선택했다. 회사와 협의해 연봉의 2.5배를 위로금으로 받았다. 회사는 ‘잡음을 내지 말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B 씨는 “내 또래 퇴직자들을 보니 ‘결혼’이 중요한 변수인 것 같다. 결혼을 한 사람은 어떻게든 회사에 붙어 있으려고 했고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회사의 희망퇴직 요구에 비교적 쉽게 응했다”고 말했다.

B 씨와 같은 그룹의 계열사에서 일하는 한 임원은 “지금 재계가 가장 몰두하는 게 ‘조용한’ 인력 구조조정이다. 인사팀은 ‘한번 고민해 보라’며 권유형으로 퇴직을 말한다. 그러고는 ‘퇴직금 플러스알파’를 제시한다. 회사 이미지를 고려해 잡음이 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싫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

2011년 중견 건설사에 입사한 C 대리(33)는 이달 초 인사 담당자로부터 희망퇴직 제안을 받았다. 인사 담당자는 “해외사업 상황이 안 좋아 50명 정도를 감원할 예정”이라며 “이달 안에 퇴직 의사를 밝히면 2년 치 연봉을 퇴직금으로 주겠다”고 말했다. 이 회사의 직원은 700명 정도다. 이 중 희망퇴직으로 7% 정도를 감원하겠다는 것이다.

C 대리는 “사측이 희망퇴직을 강요하는 것은 불법”이라며 반발했지만 인사 담당자는 “내년에 퇴직하면 퇴직금이 깎일 수 있다”며 오히려 C 대리를 압박했다.

만약 C 대리가 끝까지 퇴직을 거부하면 인사팀은 최하 고과를 줄 것이 분명하다. 그럴 경우 연봉이 깎일 뿐 아니라 퇴직금도 대폭 줄어든다. 회사의 희망퇴직 권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외 수주 시장과 국내 주택 경기가 동시에 둔화되면서 건설업계도 구조조정의 된서리를 맞고 있다. 저유가 등으로 해외사업 여건이 악화되면서 매출 중 해외 부문 비중이 높은 회사들이 감원에 들어갔다.

삼성물산의 건설 부문은 지난해 9월 말부터 지금까지 임직원을 480명 이상 줄였다. 올해부터는 회사가 ‘상시적 인력구조 개선’에 나섰다. 희망퇴직 권고 대상자에는 사원급도 포함돼 있다. 위로금은 연봉의 2배 수준이다.

이에 앞서 3분기(7∼9월) 1조5000억 원 이상의 적자를 낸 삼성엔지니어링은 이달 초부터 전 직원이 돌아가면서 한 달씩 무급휴가를 내는 ‘무급순환휴직’을 시작했다. 삼성엔지니어링의 한 직원은 “감원을 막기 위해 사우회 측이 제안한 고육지책이었다”고 설명했다. 한화건설도 9월 부장급 이상 임직원을 대상으로 명예퇴직 신청을 받았다.

금융권에도 칼바람 불어

저금리와 저성장으로 장기 침체에 빠진 금융권도 최근 대규모 인력 감축이라는 홍역을 앓고 있다. 인터넷 금융 이용자가 늘어 창구 업무가 축소되면서 금융권의 구조조정은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은 15일 전체 임직원의 18%인 961명을 내보냈다. SC은행은 2018년까지 직원 1만5000명을 감축하기로 한 SC그룹의 글로벌 구조조정 계획에 따라 지난달 만 40세 이상, 10년 이상 근속한 직원을 대상으로 특별퇴직 신청을 받았다. SC은행은 최근 대졸 공채 신입행원 50명 전원을 연봉제로 채용하는 등 성과주의를 확대하고 있다.

앞서 KB국민은행도 5월 대규모 희망퇴직을 실시해 1122명을 내보냈으며 희망퇴직을 매년 정례적으로 실시하기로 노조와 합의했다. 국민은행은 이르면 올해 안에 임금피크제 적용 대상자를 상대로 희망퇴직을 추가로 시행할 예정이다. 희망퇴직 대상자는 기존 임금피크제 대상 500여 명과 내년 임금피크제 대상자인 200여 명을 합한 700여 명이다.

우리은행도 임금피크제 대상자의 퇴직을 지원하는 ‘전직지원제도’를 통해 올해 상반기(1∼6월)와 10월 각각 192명, 13명을 감축했다.

내년에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NH농협은행도 대규모 희망퇴직을 계획하고 있다. 농협은행은 내년 임금피크제가 적용되는 만 56세 직원을 대상으로 4일부터 8일까지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는데 대상자 249명이 모두 희망퇴직을 선택했다.

매년 초 희망퇴직을 받는 신한은행의 경우 올해 초에 지난해의 2배가 넘는 311명이 퇴직했다. 신한은행도 내년에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예정이어서 내년 초 희망퇴직자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보험·카드업계에도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고 있다. 메리츠화재가 3월 희망퇴직으로 400여 명을 내보냈고 현대라이프생명도 7월 5년 차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신청받아 45명을 감축했다. 삼성생명은 10월 전직 지원 등을 통해 50명의 간부급 직원을 내보냈고 삼성카드도 같은 형태로 100명을 사실상 감원했다.

한 보험사에서 근무하는 D 씨(31)는 “요즘에는 제때 승진하지 못하면 40대 중반만 돼도 회사의 눈치를 보다 희망퇴직을 하거나 계약직으로 전환하는 선배가 많아졌다”며 “정년은 늘어나는데 희망퇴직 연령은 오히려 낮아지고 있어 긴장이 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붐비는 실업급여 창구


17일 오후 3시경 서울 중구 삼일대로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서울고용센터 1층 실업급여과. 40, 50대 장년층 20여 명이 실업급여 상담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실업급여라는 큰 글씨가 적힌 창구에서는 상담사들이 수급 자격을 설명하느라 분주했다.

그때 한 20대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와 준비해온 서류 뭉치를 꺼냈다. 얼마 전 결혼을 한 후 직장을 그만뒀다는 이 여성은 상담사에게 자신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 고용센터에서 약 1시간 동안 머무는 가운데 20, 30대 젊은 청년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직원 E 씨는 “고용센터가 위치한 곳이 서울 중구여서 대기업 동향을 피부로 접하게 된다”며 “올해 들어 대기업 퇴직자가 부쩍 늘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엔 적어도 20년 이상 근속한 분들이 퇴직 대상이었는데 요즘에는 단기 근속자도 많이 온다”라고 말했다.

E 씨는 “실업급여를 받지 못한 한 30대 여성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 여성은 육아휴직 중에 회사로부터 ‘희망퇴직 프로그램’을 안내 받았다. 두 차례 임원 면담으로 희망퇴직을 권유받은 그 여성은 더 일하고 싶었지만 퇴직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성은 “휴직 중인 나에게까지 희망퇴직을 안내한 건 사실상 회사가 내보낸 거 아니냐”라며 실업급여를 신청했다. 하지만 ‘자발적 퇴직자’로 분류돼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었다. 퇴직하지 않을 시 인사상 불이익이 있었다는 것이 입증돼야 권고사직으로 보고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E 씨는 “그 여성이 일터로 복귀할 의사가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억울한 심정도 이해된다”고 말했다.

요즘은 정보기술(IT) 업종에서 30대 퇴직자가 많다. E 씨는 “경쟁이 치열하고 기업의 체질개선이 빠르게 이뤄지다 보니 전보다 희망퇴직의 연령대가 낮아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한국 기업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곽도영 now@donga.com·천호성·박민우 기자
박형준 lovesong@donga.com·박은서 기자
#명예퇴직#청춘#구조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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