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탄생 100주년]울산 허허벌판에서 시작한 조선의 꿈… 5대양을 제패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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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1류 상품 만드는 현대중공업

정주영 명예회장이 1973년 3월 울산조선소에서 열린 시업식에서 사원들을 격려하고 있다.현대중공업 제공
정주영 명예회장이 1973년 3월 울산조선소에서 열린 시업식에서 사원들을 격려하고 있다.현대중공업 제공
1972년 현대중공업이 울산조선소를 건설하던 초창기 모습.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다. 현대중공업 제공
1972년 현대중공업이 울산조선소를 건설하던 초창기 모습.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다. 현대중공업 제공


현대는 조선사업을 추진하던 초기에 외국과의 합작을 위해 미쓰비시 등 일본과 협의했다. 일본은 1956년 세계 1위 조선국으로 부상한 뒤 성장을 거듭해 1960년대 후반엔 세계 조선시장을 50% 가까이 점유한 조선강국이었다.

1970년, 일본은 한국 조선사업의 타당성을 조사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최종결론은 “한국과의 조선소 건설 협력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그 속내에는 ‘값싸고 풍부한 양질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국의 조선공업이 성장하면 분명 일본의 시장점유율은 잠식될 것’이라는 견제가 있었다.

그렇게 일본과의 합작은 결렬됐지만 이는 전화위복이 됐다. 현대가 합작투자 방침을 포기하고 독자적으로 조선소를 건설하기로 하면서 한국의 조선공업이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산, 한국 조선을 일으키다

현대는 1971년 조선소 부지를 울산으로 확정한 채 외자 확보를 위해 영국으로 갔다. 런던에 지점을 설립하고, 당시 영국 최고의 은행이던 바클레이스 은행과 4300만 달러에 이르는 차관 도입을 협의했다. 외국으로부터의 차관 도입은 조선소 건설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였다. 하지만 바클레이스 측은 현대의 기술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거부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 일행은 바클레이스 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인 선박 컨설턴트 회사 ‘애플도어사’의 찰스 롱바텀 회장을 찾아갔다. 롱바텀 회장은 현대의 차관 상환 능력을 의심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 회장은 지갑에서 거북선 그림이 있는 500원짜리 지폐를 꺼냈다. 그리고는 거북선을 가리키며 “한국은 16세기에 철갑선을 만들었는데, 영국보다 300년이나 빠르다. 산업화가 늦어서 아이디어가 녹슬었을 뿐 한번 시작하면 잠재력이 분출돼 나올 것”이라며 설득했다. 결국 롱바텀 회장은 현대건설 등을 직접 둘러본 후 추천서를 바클레이스 은행에 건넸다. 현대의 차관 신청서는 바클레이스 은행을 통과했다.

은행은 차관을 결정했지만 영국 수출신용보증국(ECGD)의 승인도 받아야 했다.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하면 영국 정부가 책임지고 보상해주는 제도 때문이다. ECGD는 현대에 선박 구매자가 확실한 증명을 갖고 와야 승인을 해줄 수 있다고 통보했다. 현대는 즉시 선주를 찾았지만, 선주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거라곤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 한 장, 5만분의 1 지도 한 장, 그리고 26만 t 유조선 도면 한 장뿐이었다. 선주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러던 중 그리스 선엔터프라이즈사의 게오르게 리바노스 회장이 값싼 배를 구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렸다. 정 회장은 리바노스 회장이 머물던 스위스의 별장에 찾아갔다. 리바노스 회장은 정 회장의 정신에 감탄해 대형 유조선 2척을 주저없이 발주했고, 계약은 곧장 성사됐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1976년 5월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열린 초대형 유조선 명명식에서 홍콩에서 온 선주사 관계자들을 안내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제공
정주영 명예회장이 1976년 5월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열린 초대형 유조선 명명식에서 홍콩에서 온 선주사 관계자들을 안내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제공


현대중공업 기공식, 한국 조선업 기지개 켜다

1972년 3월 23일, 울산 미포만 백사장에서 정 회장을 비롯한 현대중공업 임직원과 주한 각국대사, 울산시민 등 5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기공식이 열렸다. 당시 한국에선 대한조선공사가 건조한 1만7000t급 선박이 최대였고, 세계 시장점유율은 1%도 안 됐다.

정 회장은 이날 “세계 조선사상 전례가 없는 최단 공기 내 최소의 비용으로 최첨단 초대형 조선소와 2척의 유조선을 동시에 제작하겠다”는 사업계획을 밝혔다. 아울러 “초창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우리는 근면과 노력으로 정부와 국민의 협력을 얻어 본 사업을 필히 성취시킬 결심이다”라며 각오를 다졌다.

2년여 뒤인 1974년 6월 28일, TV로 전국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준공식 겸 1, 2호선 명명식이 국가적인 행사로 성대하게 개최됐다. 선주 리바노스는 정주영 창업자에게 “지금까지 내가 본 배 가운데 가장 잘 만들어진 배”라며 인사했다. 현대중공업이 국내외의 우려를 깨끗이 씻어내고 세계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하는 순간이었다.

두 차례 오일쇼크 이겨내고 10년 만에 정상에

한국 조선업이 수주량 기준으로 처음 일본을 누르고 세계 1위를 기록한 건 1993년, 본격적으로 1위를 차지한 것은 1999년부터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은 이보다 앞선 1983년에 일찍이 세계 1위에 올랐다. 일본의 경제주간지 ‘다이아몬드지’는 1985년 특집호에서 1983년 건조량을 기준으로 현대중공업을 조선 부문 세계 1위 기업으로 선정했다. 조선소 기공식을 가진 지 11년, 선박 건조 시업식을 가진 지 불과 10년 만에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이다.

이는 1973년과 1978년의 1, 2차 오일쇼크 위기를 겪은 뒤 이뤄낸 성과였다. 두 차례의 오일쇼크 당시 세계 해운·조선 경기는 냉각됐고 신흥 현대중공업도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현대중공업은 불황 타개를 위해 초대형 유조선 외 다목적 화물선, 벌크선, 목재 운반선 등으로 선종을 다변화시켰다. 1975년엔 수리조선소인 현대미포조선을 설립했고, 육·해상 구조물을 제작하는 철구사업부를 신설하는 등 사업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1976년에는 주요 부품인 선박용 엔진 생산을 위한 엔진기계사업본부를 발족시켰다. 현대중공업은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으로 오일쇼크 위기를 극복한 뒤 1983년 처음 세계 1위에 올라선 이래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세계 조선업의 새 이정표를 세워가며 기술력을 높이 평가받은 덕이다.

현대중공업은 국내 최초로 부유식 원유생산저장하역설비(FPSO)와 액화천연가스(LNG)선을 수출했다. 2010년엔 세계 최초로 선박용 대형엔진 생산 누계 1억 마력을 돌파했고, 2012년엔 세계 최초로 선박 인도 1억 GT(선박 전체의 용적을 톤수로 환산한 개념)를 달성했다. 지난해엔 세계 최초로 부유식 액화천연가스 저장 및 재기화설비(LNG-FSRU) 건조를 완료하는 한편 세계 최대인 1만9000TEU급 컨테이너선의 건조에 들어갔다. 5월에는 세계 최초로 선박 2000척을 인도하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조선의 역사가 긴 유럽과 일본의 업체들도 달성하지 못한 전인미답의 기록을 세우며 세계 조선업의 새 역사를 써나간 것이다.

현대중공업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36개의 세계일류상품(산업통상자원부 인증)을 보유한 기업이기도 하다. 세계일류상품은 세계 시장 점유율이 5위 이내인 상품으로, 현대중공업은 컨테이너선, LNG선, FPSO, 드릴십, 컨테이너선, 대형엔진, 굴삭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일류상품을 보유하고 있다.

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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