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치영]선배 세대가 미워진다는 H에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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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치영 경제부 차장
신치영 경제부 차장
H야, 얼마 전 수화기 너머로 떨리던 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도는 것 같다. 너는 지금까지 너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다고 했지. 이렇게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며 혹독한 전입신고를 치르는 게 어른들의 탓인 것만 같다면서.

H야, 2013년 서울 한 대학의 인문학과를 졸업한 너는 2년 넘게 100여 개 회사에 이력서를 냈지만 취직이 쉽지 않았지. 어렸을 때 네가 영재까진 아니어도 “공부 꽤 한다” 소리 들을 정도로 노력하는 아이였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고종사촌 동생이라 더 그랬겠지만,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다닐 만큼 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고 성실하게 살아온 네가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걸 보고 ‘이건 정말 뭔가 잘못됐구나’ 싶었단다.

너는 결국 석 달 전 작은 정보기술(IT) 회사에 인턴사원으로 입사했지. 정규직은 아니지만 잘 모르는 분야의 일을 배울 기회가 될 것 같아 가슴 설렌다는 네 모습이 보기 좋았단다. 그래서 네가 어떻게든 그 회사에서 잘 풀리기를 바랐다.

H야, 그런데 두 달쯤 지나 그 회사에서 일감이 많이 줄었으니 그만 나오라고 했다지. 밀린 한 달 치를 합쳐 두 달 치 월급을 통장으로 입금해 주겠다면서. 그러고는 회사를 그만둔 지 한 달이 지나도 돈이 입금되지 않았고, 전화를 해봐도 통화가 되지 않아 그 회사를 찾아갔더니 사무실을 어딘가로 옮긴 상태였다는 네 얘기를 들었을 때 나도 말문이 막혔단다.

“200만 원 정도 되는 돈을 받으면 부모님께 작은 선물을 사드리고 부모님께 손 안 벌리며 4, 5개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도 첫 직장이었는데…. 취직도 못 하고 인턴 월급까지 떼이고…. 이 사회가, 선배 세대들이 무서워져요.” 읊조리듯 말하는 너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용기를 내고 견뎌 보라는 나의 말이 너에겐 얼마나 공허하게 들렸을지 상상이 된다.

정치권이 합의한 공무원연금 개혁안도 따지고 보면 젊은 세대의 짐만 무겁게 한 것이고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높이자는 것도 결국 선배 세대가 많이 받는 대신 후배 세대에게 세금 폭탄을 떠넘기겠다는 것이니 왜 선배 세대가 원망스럽지 않겠니. 정년 연장으로 청년층의 취업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걱정하는 것도 알고 있단다.

하지만 H야, 우리 선배 세대도 제대로 취업도 못 해 마음고생하는 후배 세대에 가슴 아파하고, 너희에게 더 좋은 시절을 열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너희는 결국 우리 누군가의 아들딸 조카들이 아니겠니. 1970, 80년대 우리를 키워낸 우리의 선배 세대처럼 우리도 후배 세대들에게 번듯한 직장을 물려주고 싶은 마음은 똑같단다.

세대갈등 운운하며 선배와 후배, 아버지와 아들의 경쟁을 부추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 우리는 서로 도와가며 이 사회를 이끌고 가야 하는 운명의 공동체 안에 있단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앞에서 허둥대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정부를 생각하면 원망스럽겠지만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몸을 던지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보렴. 공동체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어 가능한 것 아니겠니. 선배와 후배 세대도 갈등하고 다투기보다 서로 힘을 합치고 희생하고 도와주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 공동체가 건강해지겠지.

H야, 세상에는 너를 좌절시키는 어른들만 있는 것은 아니란다. 머잖아 너를 도와주고 이끌어주려는 선배들을 만날 수 있을 거야. 희망을 버리지 말고 조금만 더 참아보렴. 언젠가는 너희 세대들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될 테니까.

신치영 경제부 차장 higgledy@donga.com
#H#취직#노력#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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