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외화예금 쌓아둔채 ‘눈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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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외환은행 딜링룸. 외환시장 마감인 오후 3시가 가까워졌지만 조용했다. 주문을 외치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긴 했지만 시장이 요동칠 때처럼 다급한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강창훈 외환은행 자금시장본부장은 “현재 외환 거래량은 지난해 이맘때의 50∼60% 수준”이라며 “기업들이 달러를 꽤 들고 있지만 매물이 많이 나오지는 않는 편”이라고 말했다.

외환시장에서는 달러 거래가 한산하지만 은행 외화예금 창구에는 수출 기업들이 벌어들인 달러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외화예금이 상반기에 빠졌다가 하반기부터 크게 증가했다”며 “단기 결제성 대기 자금이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 ‘불황형 흑자’에 기업 외화예금 증가

4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9월 말 기준 국내 은행의 외화예금은 774억1000만 달러로 지난해 말(683억1000만 달러)보다 91억 달러(13.3%) 증가했다. 여기에는 기업들의 외화예금 증가가 큰 영향을 미쳤다. 기업들의 9월 말 기준 외화예금 금액은 644억 달러로 2012년(565억6000만 달러)에 비해 13.9% 증가했다. 이는 무역수지 흑자가 이어지면서 기업들의 ‘달러 사정’이 나아진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속을 까보면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내수 침체에 따른 수입 감소가 무역 흑자의 주된 요인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올해 1∼10월 수출은 1.9% 늘었지만 수입은 1.2% 감소했다. 12월 말 결제 수요가 몰리면서 대기자금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달러가 넘쳐나는 원인이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단기 자금을 넣어두는 외화 보통예금 잔액이 11월 말 기준으로 지난해 말보다 43% 증가했다”며 “12월에 결제수요가 많아 외화예금 잔액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 “금리 낮을 때 달러 마련하자”

외화예금 증가에는 공기업의 움직임이 결정적이었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로 달러가 부족해질 것을 대비해 6월경 정부가 에너지 공기업들에 ‘외화채권을 발행해 달러를 확보하도록’ 독려한 게 컸다.

금융권에 따르면 외화예금 증가 기업 중 상위 10개 기업이 모두 한국가스공사 등 공기업이다. 가스공사는 3분기(6∼9월)에만 12억9000만 달러어치의 외화채권을 발행했는데, 이는 2분기 발행액의 15배에 이르는 금액이다.

한 공기업 관계자는 “선진국 경기가 살아나고 미국 달러가 강세가 되면 자금을 유치하기 위한 금리도 높아진다”며 “기업 입장에서는 금리가 쌀 때 미리 달러를 확보하는 게 유리하다”고 말했다.

○ “한꺼번에 달러 쏟아지면 환율 급락 우려”

보유 외화 규모가 크지 않은 일부 중소기업 중에는 미국 양적완화 축소 뒤 환율이 반등할 거라 보고 기다리는 곳도 있다. 발전소용 파이프를 수출하는 A기업은 “엔화 약세인 상황과 양적완화 축소를 고려하면 조만간 환율이 올라갈 것으로 본다. 당장 원화가 필요한 것도 아니어서 일단은 달러를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기업들이 쌓아놓은 외화가 언젠가는 시장에 풀릴 거라는 것. 전승지 삼성선물 연구원은 “경계선인 달러당 1050원이 무너질 경우 기업들이 앞다퉈 달러를 쏟아낼 수 있고 이는 환율 급락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기획재정부는 “달러 매물이 특정 시점에 쏟아지는 쏠림 현상이 재연되면 수출입업체 간담회 등을 통해 협조를 요청할 수 있으나 지금은 크게 우려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한우신 hanwshin@donga.com / 세종=홍수용 기자
#기업#외화예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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