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Up]이건희 회장 삼성 경영 25년… “초일류 기업으로” 취임사가 현실로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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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다음 달 1일로 취임 25주년을 맞는다. 이 회장은 1987년 11월 19일 부친인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별세한 뒤 그룹 경영을 물려받아 삼성을 국내 최고에서 세계 최고 기업으로 키워냈다. 그 사이 그룹 매출은 1987년 9조9000억 원에서 2012년 384조 원(예상액)으로 39배로 늘어났다. 수출은 해외 현지법인 몫을 빼고도 63억 달러에서 1567억 달러로 증가했다. 삼성을 ‘제2의 창업’ 수준으로 성장시킨 이 회장의 경영 25년을 살펴본다. 》

○ 초일류에 대한 열망과 위기경영

“회장에 취임한 이후 세기말적 변화에 대한 기대와 위기감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모든 것을 빼앗아가 버리는 종말의 시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삼성그룹 임직원 교육자료 ‘삼성 신(新)경영’)

경영 전문가들은 이 회장의 경영방식을 대표하는 키워드로 ‘위기’를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45세에 국내 최대 그룹의 경영권을 물려받은 그는 의도적으로 위기를 강조했다. 조직원들은 ‘우리가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글로벌 시각에서 보면 2류에 그친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제자리걸음을 하면 3류로 처진다는 위기감을 불어넣었다. 1993년 일명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불리는 이 회장의 신경영은 이렇게 해서 나왔다.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것입니다. 지금처럼 잘해봐야 1.5류입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꿉시다.”(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

초일류에 대한 이 회장의 열망은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할 때의 일화에서 확인된다. ‘반도체 왕국’인 일본에 결코 대적할 수 없을 것이라는 평가를 무릅쓰고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뒤 20년 만에 세계 1위 반도체 회사로 키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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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연세대 교수는 “선대 회장 시기의 삼성은 경영관리 수준을 높이는 ‘관리의 삼성’으로 충분했지만 글로벌 경쟁 국면에선 통하지 않았다”며 “글로벌 초일류 기업이라는 높은 열망 수준을 제시하고 조직에 위기감을 불어넣는 위기경영이 삼성을 지금의 자리로 끌어올린 것”이라고 분석했다.

○ ‘불량은 암(癌)’

신경영 선언 이후에도 과거의 행태는 쉽게 일소되지 않았다. 1994년 삼성전자 무선전화기 사업부는 품질에 자신이 없었지만 무리하게 완제품 생산을 추진했다. 불량률이 11.8%까지 올라갔다. 명예회복을 위해 일부 모델 생산을 중단하기도 하고 원인을 유형별로 분석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이 회장은 ‘불량은 암이다. 자꾸 옮아가면 결국 망하게 된다’라고 생각했다. 무선사업부의 사정을 보고받은 그는 시중에 나온 불량제품을 모조리 회수해 공장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태워 없애라고 지시했다. 그해 3월 9일 ‘품질은 나의 인격이요, 자존심!’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내걸린 구미사업장 운동장에서 2000여 명의 임직원이 굳은 표정으로 앉은 가운데 ‘화형식’이 열렸다. 산더미처럼 쌓인 500억 원 상당의 휴대전화와 키폰(업무용 전화기) 등에 불을 붙였다.

불길은 이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당시 무선사업부 이사였던 이기태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내 혼이 들어간 제품이 불타는 것을 보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교차했다. 이상하게도 타고 남은 재를 불도저가 밀고 갈 때쯤 각오랄까, 결연함이 생겼다. 그 불길은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해 국내 시장점유율 4위였던 삼성전자의 휴대전화는 이듬해 1위로 올라섰다.

○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리는 인재’

“일본은 마른 수건을 짜고 있고, 우리는 물수건을 짜고 있다. 그 다음은 두뇌 싸움이다. 그래서 천재가 필요한 것이다.”(삼성 신경영)

이 회장은 한 사람의 인재가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고전경제학의 생산요소인 노동과 자본에 더해 경영과 지식근로자의 중요성을 강조한 피터 드러커를 높이 평가했다.

이 회장은 2002년 사장단 워크숍에서 “200∼300년 전에는 10만∼20만 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 살렸지만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리는 인재 경영의 시대, 지적 창조력의 시대가 열린다”고 강조했다. 이후 이른바 ‘S급 인재(핵심 인재)’ 영입은 삼성그룹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의 지상 과제가 됐다. 인재 확보에 돈을 아끼지 않고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여성 인력 활용에 공을 들인 것도 우수 두뇌에 대한 끝없는 열망에서 비롯됐다. 이 회장은 지난해 삼성그룹 여성 임원들과 오찬을 함께한 자리에서 “여성 임원이 사장까지 돼야 한다”며 이들을 격려했다.

○ ‘메기론’과 앞으로의 숙제


“최고경영자는 좋은 의미에서 ‘메기’가 돼야 한다.”(1991년 이 회장의 신문 기고)

천적인 메기와 같은 공간에서 사는 미꾸라지들이 자기들끼리 평화롭게 지내는 개체들보다 건강한 것처럼 CEO는 부하들을 긴장시켜 조직을 활력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올해 7월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의 분기 실적을 내며 애플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순간 이 회장은 다시 위기론을 꺼내들었다. “모든 이익의 70%가 집중된 스마트폰을 빼면 나머지는 사실상 적자”라는 야박한 평가가 그룹 수뇌부에서 흘러나왔다. 이럴 때일수록 축제 분위기를 버리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이 회장은 갑작스레 출근 시간을 오전 6시 30분으로 앞당겼다. 초긴장 모드는 전 그룹에 확산됐다. 금융, 건설 등 다른 분야 계열사들도 삼성전자 못지않은 초일류 기업이 돼야 한다는 압박감을 더욱 느끼고 있다.

사실 이 회장의 위기경영은 단순한 엄포가 아닐지도 모른다. 전문가들은 삼성이 세계 최고 기업의 반열에 오른 만큼 기존 시장의 1등을 따라잡는 데 능한 제조기업이 아니라 시장을 창조하는 ‘마켓 크리에이터(Market Creator)’가 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갈림길에 선 삼성그룹의 경영철학이 지금까지와는 달라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이 회장 한 명의 카리스마 경영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형태로는 지속가능한 성장이 어렵다는 지적이다.

지금까지는 ‘한국 경제의 대표선수를 밀어주자’는 편이었던 국내 정치와 사회 분위기가 이제 삼성의 독주를 견제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는 것도 큰 변화다. 이에 따라 그룹 지배구조의 개편이나 불투명한 후계구도의 정립 등이 풀어야 할 숙제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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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정진욱 기자 nex@donga.com
#이건희#삼성전자#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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