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지만 강한, 열대의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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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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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녀’의 영역으로 불리던 해외건설 현장에 국내 건설사 여직원들의 진출이 늘어나고 있다. 왼쪽부터 현대건설 권혜령 대리, 삼성건설 강채리 기사, GS건설 신근해 차장, 포스코건설 강혜원 기사. 각 건설사 제공
‘금녀’의 영역으로 불리던 해외건설 현장에 국내 건설사 여직원들의 진출이 늘어나고 있다. 왼쪽부터 현대건설 권혜령 대리, 삼성건설 강채리 기사, GS건설 신근해 차장, 포스코건설 강혜원 기사. 각 건설사 제공
걸프 만(灣)에 인접한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업도시 주베일. 한 달에 두세 번씩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모래바람이 엄습하고, 1년에 7개월 이상 낮 기온이 50도를 웃돌아 웬만한 성인 남성도 버티기 힘든 곳이다. 현대건설 권혜령 대리(32)는 이곳에서 22개월간 가스처리 시설에 필요한 자재를 구매하고 사업일정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그는 6000명의 근로자가 일하는 사우디 현장에서 유일한 여성. 최근 현장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권 대리는 “2년 군복무를 마친 기분”이라며 “현지생활이 쉽지 않았지만 ‘여직원’에 대한 편견이 생기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10월경 다시 사우디아라비아의 또 다른 건설현장으로 나가 모래바람과 불볕더위와의 전쟁을 치를 예정이다.

‘제2의 황금기’를 맞고 있는 해외건설 현장에 여성인력의 진출이 활발하다. 그동안 해외 현장은 여성들의 활동에 제약이 많은 중동지역에 밀집한 데다 통제된 조직생활을 해야 하고, 수십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다국적 건설공사 인력을 다뤄야 하는 업무 특성 등으로 ‘금녀(禁女)의 영역’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국내업체의 수주지역이 다양해지고, 공사 내용도 토목이나 건축물 시공 일변도에서 벗어나 설계나 자재구매, 사업관리 등으로 확대되면서 여성 특유의 꼼꼼한 관리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4월 말 현재 해외 건설현장에 나가 있는 여성직원은 약 50명. 현대건설의 권 대리와 삼성물산 건설부문(삼성건설)의 강채리 기사(27), GS건설의 신근해 차장(40), 포스코건설의 강혜원 기사(25) 등이 대표선수 격으로 이들은 각각 사우디아라비아,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 페루 현장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이들은 업무적인 어려움보다 “현장에서 ‘여성’이라는 특수성을 극복하는 게 가장 힘들다”고 입을 모았다. 2010년 6월부터 아랍에미리트 루와이스 석유생산시설 공사 현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GS건설 신 차장은 “현장에 여자가 드물다 보니 파견 초기엔 현장 근로자들이 저를 동물원 원숭이 보듯 쳐다봐 힘들었다”며 “아랍에미리트에서 다른 현장으로 출장을 갈 때에는 비자가 발급되지 않는 등 보이지 않는 차별도 겪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16개월째 싱가포르 해안고속도로 현장을 누비는 삼성건설의 강 기사는 “내가 하는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여직원에 대한 오해로 이어질까봐 항상 긴장하게 된다”며 “이런 이유로 업무성과를 내기 위해 다른 직원보다 몇 배 더 애를 쓰게 된다”고 귀띔했다.

불현듯 찾아오는 외로움은 해외 현장에서 이겨내야 할 장애물 중 하나다. 현장에선 고민을 털어놓을 동성 친구를 찾기가 어렵고 가족,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입사 3개월 만인 지난해 3월부터 페루 칠카우노 복합화력발전소에서 스팀터빈 시공 업무를 맡고 있는 포스코건설 강 기사는 “가급적 자주 스마트폰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이용해 부모님, 친구와 연락을 하며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고 소개했다.

운동을 하거나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도 해외 현장에 나간 여직원이 적적함을 이겨내는 방법 중 하나다. GS건설의 신 차장은 “긴 파견 기간 탓에 결혼 시기를 놓쳤다”며 “해외근무 초기에는 아랍 왕자와 결혼하겠다는 원대한 꿈도 꿨지만 이제는 결혼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단계”라며 웃었다.

이들은 해외공사 현장의 생활에 대해 “힘든 것은 분명하지만 ‘행운’이었다”고 평가했다. 해외 현장에서만 배울 수 있는 생생한 건설 노하우가 있고, 끈끈한 동지애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건설 권 대리는 “현장의 직원들은 모두 미국과 영국 등에서 학위를 받은 전문가”라며 “다양한 국적의 전문가와 협업을 하며 프로젝트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GS건설 신 차장 역시 “건설사에 근무하는 직원이라면 남녀 구분 없이 해외 현장 근무는 필수 코스이며 나 또한 다시 현장 근무를 자원할 것”이라며 “다만 다음번에는 아랍에미리트보다는 여성의 활동에 제약이 덜한 곳으로 배치받기를 희망한다”며 웃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해외건설#여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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