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 이면에는 법칙이 있기 마련입니다.” 금융계량화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최근 국내 금융가에선 김남의 삼성자산운용 펀드매니저(왼쪽)와 임형균 미래에셋자산운용 리스크관리팀 사원 같은 공학도 출신 금융인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여의도로 온 KAIST 공학자들?’
‘퀀트’(Quant·계량분석)로 미국 월가를 휩쓸었던 수학 천재들처럼 서울 여의도 증권가에도 명문 공대를 졸업한 젊은 공학도들의 입성이 급증하고 있다. 한국형 헤지펀드 도입을 앞두고 리스크관리나 파생상품 설계 등에서 수리적 배경이 탄탄한 공학도들을 영입하려는 수요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금융가에는 석·박사학위 소지자를 제외한 순수 KAIST 학부생 출신들만 100명 안팎에 이른다. 졸업한 뒤 바로 금융권에 진입하는 이들이 부쩍 늘면서 지난해에는 동문회까지 조직됐다.
삼성자산운용 상장지수펀드(ETF) 운용팀의 5년차 펀드매니저 김남의 씨(27·여)와 지난해 7월 미래에셋자산운용 리스크관리팀에 입사한 임형균 씨(26)도 그런 경우다. ‘02학번’인 김 씨는 산업공학과, ‘03학번’인 임 씨는 물리학과 출신으로 모두 졸업과 동시에 금융권에 첫발을 디뎠다. 이들은 “응용수학, 산업공학 등과 금융을 결합한 금융수학, 금융통계를 비롯해 재무 회계 등 관련 수업 개설이 늘어나는 추세라 일찍부터 금융업에 관심을 둘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두 사람처럼 요즘 KAIST 출신들은 입사와 함께 바로 운용 관련 핵심 부서에 배치된다. 과거 공학도들이 주로 증권사 전산 관련 업무에 배치되던 것과는 사정이 크게 다르다. 주가지수를 따라가도록 설계된 ETF 운용이나 나날이 복잡해지는 금융상품의 리스크를 관리하는 일에는 금융공학 지식이 핵심적이다. 이런 업무에서는 벤치마크와의 수익률 차이를 뜻하는 ‘트래킹 에러(Tracking error·추적 오차)’ 관리가 특히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수리적인 개념이 있어야 응용분야를 넓히기가 쉽다. 김 씨는 “요즘엔 위험을 일정 수준으로 관리하면서 더 높은 수익을 추구하는 ‘인핸스트 인덱스(Enhanced index)’기법이 많이 사용되는데 여기에도 최적화, 시계열분석 등 공학적 지식들이 예외 없이 깊게 관련돼 있다”고 말했다.
기술적인 측면 외에 ‘공학적인 사고방식’도 업무 효율에 직결된다. 임 씨는 “물리학을 하면서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태도가 자연스레 몸에 뱄다”며 “‘어떤 현상이든 규칙이나 근본 원리가 있을 것’이라는 물리학적 사고방식은 증시의 변동성과 그에 따른 위험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금융업계는 엘리트 공학도에 대한 수요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국내 금융시장을 떠받치고 있는 양대 화두인 ‘절대수익 추구(헤지펀드)’와 ‘자산관리’의 밑바탕이 금융공학이기 때문이다. 석유를 사느냐, 금을 사느냐, 주식 비중을 얼마로 하느냐를 판단하는 자산배분의 근거에서부터 절대수익을 추구하기 위해 이용하는 첨단 운용기법에 이르기까지 이런 계량화를 거쳐 정교하게 다듬어진다.
두 사람은 ‘신의 손’을 가진 사람들이 계량화하기 힘든 ‘초월적 감각’으로 투자수익을 내던 시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끝났다고 말한다. 임 씨는 “퀀트란 용어가 냉전이후 실직한 미국항공우주국(NASA) 출신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복합파생상품이자, 금융위기를 불러일으킨 원흉이란 의미로 오해되기도 한다”면서도 “데이터, 숫자를 기반으로 찾아낸 규칙을 바탕으로 투자판단의 로직(logic·논리)을 돕는다는 본뜻에 비춰보면 앞으로 퀀트의 역할은 무궁무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국내 금융계에서 공학도 출신이 늘고 있다 해도 월가와 세계 금융시장을 장악한 수학자, 물리학자들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편”이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김 씨는 “‘KAIST 출신 여성 매니저’는 업계에서도 아직 낯설고 특이한 이력”이라고 했다. 김 씨는 앞으로 국내 ETF 시장의 도약기를 이끄는 여성 임원을, 임 씨는 헤지펀드 매니저를 꿈꾸고 있다. 이들은 “공학도로서의 장점을 십분 발휘해 토종 헤지펀드 시대 개막과 같은 한국 금융시장의 격변기 속에서 합리적인 투자 판단을 돕는 금융인으로 성장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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