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파주시에서 고추 농사를 짓는 한모 씨는 요즘 밭에 나갈 때마다 속이 썩는다. 지난해 이맘때에는 통통하게 자라있던 고추가 올해는 계속된 폭우로 절반 이상 망가졌기 때문이다. 한 씨는 “고춧잎이 누렇게 변하고 줄기가 까맣게 말라 죽어가고 있다”며 “배수로도 늘리고 애를 썼는데 워낙 오래 비가 쏟아져 별 소용이 없었다”고 한탄했다.
고추 농사를 망친 건 한 씨뿐이 아니다. 전북 군산시에서 고추 농사를 짓는 임모 씨도 올여름 400mm 넘게 내린 비에 고추의 3분의 2를 잃었다. 임 씨는 “하우스 안 고추들이 몽땅 침수돼 잎이랑 줄기가 시들시들하다”며 “장마 후 고추 탄저병까지 돈다고 해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15일 고추 농가와 각 지역 농업기술원에 따르면 최근 폭우가 지난 뒤 경기, 충남북, 전남북, 경남 등 전국 곳곳에서 고추 농가들의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 침수 피해도 문제지만 장마 뒤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고추 전염병’이 더 큰 문제다. 고추 표면이 불에 탄 것처럼 갈색으로 변하는 ‘고추 탄저병’, 역병, 세균성점무늬병, 무름병 등이 대표적이다. 잎과 줄기를 상하게 하는 담배나방도 고추에 피해를 준다. 이런 병들은 비가 잦고 장마가 긴 해에 많이 발생한다. 수확량을 급감시키고 상품가치를 떨어뜨려 농가에 타격이 크다.
실제 충북농업기술원이 조사한 충북지역 고추병 발생 현황을 보면 15일 현재 진딧물에 의해 전염되는 ‘오이모자이크 바이러스’ 감염 비율이 66.8%에 달해 지난해보다 두 배로 급증했다. 고추 탄저병도 무섭게 퍼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14.1%의 농가에서 발병했으나 올해는 거의 모든 농가에서 발병한 것으로 파악됐다.
농촌진흥청 관계자는 “역병 피해를 줄이려면 밭의 물 빠짐을 좋게 하고 병든 작물은 재빨리 따서 버린 뒤 철저히 소독을 해야 한다”며 “하지만 올여름에는 워낙 많은 비가 계속 내려 관련 작업이 제때 이뤄지지 못하면서 피해가 더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고추 수확량이 급감할 것으로 우려되는 가운데 최근 고추 값은 전년보다 큰 폭의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13일 서울 농산물도매시장에서 거래된 고추 가격을 보면 품종에 따라 전년보다 적게는 31%에서 많게는 227%까지 가격이 급등했다. 가격이 가장 많이 오른 것은 꽈리 풋고추(중품·4kg)로 지난해 7578원에 거래되던 것이 현재 2만4763원에 거래돼 전년 대비 227% 올랐다. 홍고추(89%), 청양고추(84%), 풋고추(51%), 건고추(31%) 등 다른 고추 품종도 모두 가격이 크게 뛰었다.
농진청은 “올해는 비가 많이 오는 것도 문제지만 계속 오는 게 더 문제”라며 “올여름 장마 기간 대비 강수일수 비중은 82.3%로, 측정 이래 가장 높았고 강수량도 평년의 1.7배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농진청은 “이 때문에 고추뿐 아니라 벼, 포도, 사과 등도 전염병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고추 외에 배추와 무도 폭우 피해를 봐 수확량이 크게 줄었다”며 “이달 중순 가격이 각각 전년 대비 40% 이상 높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연구원은 “특히 과거 10년간 기상 변수를 고려할 때 고온 등으로 작황이 더욱 나빠질 확률이 35%”라며 “이럴 경우 무, 배추 가격은 평년의 두 배 수준에 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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