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일류와 삼류가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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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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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아들은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간다. 아이를 볼모로 맡긴 학부모지만 단 한 번도 담임선생님께 선물을 한 적이 없다. 이번 설에는 선물을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안 했다. 강심장이라서가 아니다. 2년 전 아들이 입학할 때다. 아이 엄마가 “잘 부탁합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라고 전화를 했다. “우리는 어떤 명목으로도 금품을 받지 않습니다. 마음만으로 충분합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후에도 몇 차례 비슷한 대화가 오갔다. 이젠 ‘속마음은 다르지 않을까’라는 의심도 하지 않는다.

주요 백화점들의 올 설 선물세트 판매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백화점 업계는 설 대목 호황의 이유로 법인의 단체구매 증가를 꼽았다. 뭉텅이로 설 선물세트 배달을 의뢰한 법인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 중 상당 부분은 ‘납품의 먹이사슬’에서 바닥권에 머무는 병(丙)이 을(乙)에게, 또 을이 갑(甲)에게 보낸 것이란 짐작은 어렵지 않다.

이런 생각은 ‘위대한 기업을 넘어 사랑받는 기업으로(Firms of Endearment)’라는 책에 미쳤다. 지난달 24일 이명박 대통령이 대기업 총수들을 만난 자리에서 일독을 권한 책이다. 고객, 동료, 파트너, 투자자 등 모든 이해관계자의 충성, 나아가 애정을 확보하는 것이 성공하는 기업의 비결이라는 요지다.

한 예가 미국에 진출한 일본 자동차회사 혼다다. 80% 이상의 부품을 협력업체에서 사들이는 미국의 혼다는 제조업체라기보다 조립업체에 가깝다. 자연히 협력업체들이 잘돼야 혼다가 산다. 이 때문에 혼다는 베스트파트너(BP)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부품 공급업체들의 생산성, 제품의 질뿐만 아니라 수익성까지 꼼꼼히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존 디어는 미국 농기계 시장의 독점기업이다. 협력업체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은 것이 비결로 꼽힌다. 과정은 이런 식이다. 협력업체가 90원을 들여 만든 부품을 10원의 이익을 남기고 100원에 납품한다고 치자. 다른 기업들은 협력업체에 1원의 이익만 남길 것을 강요해 91원에 사들이지만 존 디어는 함께 머리를 맞대 제조원가를 70원으로 낮춘 뒤 90원에 납품받는다. 원가절감의 과실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다.

이런 관계에선 하청업체 착취니, 갑을이니 하는 말은 발붙일 틈이 없다. ‘인사’에 신경 쓰는 것이 거래관계를 유지하는 지름길이란 수군거림도 없다. 국내 기업들도 달라지고는 있다. 일부 대기업은 이해관계자에게 금품을 받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긴가민가했던 협력업체들도 보낸 선물이 몇 번 되돌아오자 명절 선물 대상에서 이들을 빼놓기 시작했다. 촌지 걱정을 하지 않는 학부모가 올바른 교육을 고민하듯 협력업체들은 시름을 덜고 제품의 질과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데 나설 수 있게 된다.

올해도 많은 국내 기업이 일류, 초일류 기업이 되겠다는 비전을 대내외에 공표했다. 그러나 혼자만 일류면 무슨 소용인가. 협력업체들이 삼류에 머무는 한 둘이 함께 만드는 결과물은 잘해야 이류다. 사랑받는 기업의 출발은 협력업체도 일류가 될 수 있도록 본업에 매진하게 해주는 작은 실천에서 비롯된다.

정경준 산업부 차장 news9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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