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솟음치는 아시아]인수합병 ‘동세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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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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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3월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중국과 인도 등 신흥시장이 서구 기업들을 끌어들이는 ‘자석’ 역할을 하고 있다”며 “이들 시장에서 합병의 열기가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파산 상태의 서양 기업을 아시아 기업들이 사들이는 데 대해 경제위기로 신음하던 미국과 유럽은 고마움과 두려움이 반반씩 섞인 시선을 보냈다. ‘우리의 일자리를 지켜준 은인’이라는 반응이 나오는가 하면 여론이 악화돼 거래가 성사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모든 사람이 동의한 것 한 가지는, 골드만삭스의 최고재무책임자(CFO)인 데이비드 비니어의 말처럼 “이제 신흥시장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
○ 경쟁력 확보 위해 M&A 적극적

신흥시장 중에서도 특히 2000년대 이후 아시아 국가의 기업들이 미국과 유럽의 선진 기업을 쇼핑하다시피 인수한 데 대해서는 ‘동세서점(東勢西漸)’이라는 표현도 모자랄 정도다. 세계 5위의 투자국으로 떠오른 중국에서는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까지도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해외 인수합병(M&A)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시장정보 제공업체 딜로직의 통계를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2009년 중국 기업이 해외 기업 M&A에 쓴 금액은 무려 433억9000만 달러(약 49조 원)에 이른다.

중국 지리자동차는 스웨덴의 고급 브랜드 볼보를 지난해 18억 달러에 인수했으며, 난징자동차는 영국 제조업의 자부심이었던 MG로버를 사들였고, 징시중공업은 미국 델파이를 샀다. 중국석유화학공사(SINOPEC·시노펙)는 지난해에만 세계 최대의 오일샌드업체 신크루드 캐나다와 스페인의 석유기업 렙솔의 브라질 자회사 지분을 100억 달러어치 이상 매입했다.

인도에서는 국민기업 타타그룹이 영국의 차(茶) 회사 테틀리 티와 영국-네덜란드의 합작회사였던 세계 6위의 철강회사 코러스, 그리고 스포츠카로 유명한 재규어 랜드로버를 사들였다. 인도 3대 대기업인 릴라이언스그룹도 통신과 정유, 금융 부문에서 M&A에 적극적이다.

한국에서도 STX그룹과 두산인프라코어가 각각 세계 2위의 크루즈 제조업체인 노르웨이 아커야즈와 미국의 건설중장비업체 밥캣을 인수했으며, 일본 기업들은 적대적 M&A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 자금력 바탕으로 ‘기업 사냥’

아시아 기업들이 이처럼 서양 기업들을 사들이는 근본적인 배경은 아시아의 경제력 자체가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지리차와 타타자동차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거래 당사자인 인수 기업들은 자국 내수 시장의 기록적인 성장을 바탕으로 힘을 키울 수 있었고, 아시아 국가에서 금융시장도 급성장하면서 이들 기업에 쉽게 자금을 대줄 수 있었다.

글로벌 회계·컨설팅 법인인 언스트앤드영(E&Y)과 한국금융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1∼6월) 아시아지역 기업공개(IPO) 규모는 620억 달러로 전체 시장 규모 988억 달러의 63%를 차지하면서 전 세계 IPO 시장의 회복을 이끌었다. 특히 미국 뉴욕증권거래소가 발표한 지난해 상반기 IPO 통계에 따르면 중국 선전 증시의 IPO 규모는 뉴욕거래소나 도쿄증권거래소를 제치고 단일 거래소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경제 발전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화폐 가치가 높아진 것은 해외 기업을 인수할 때 더 적은 돈으로 쉽게 입찰에 참여하는 데 도움이 됐다. 세계 금융위기 기간에는 내수 경기 활황에 힘입어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경제의 흔들림이 없었던 덕도 봤다. 지난해 10월 말 기준으로 외환보유액 순위 1∼5위 국가도 러시아 한 곳을 제외하면 중국 일본 대만 인도 등 모두 아시아 국가들이다. 6위는 한국이다.

서양 기업 인수에 나선 아시아 기업들은 자국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도 도움을 받았다. 중국은 2009년 ‘해외투자 관리방법’을 지정해 M&A 절차를 신속하게 마칠 수 있도록 했으며, 수출환급세와 세금 감면을 통해 해외투자기업에 대한 부담을 완화해줬다. 타타자동차의 아룹 매커지 홍보 담당 차장은 “타타그룹이 2000년 이후 해외 기업 인수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관련 규제가 당시부터 완화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인수 효과는 아직… “소화 중”

아시아의 후발 기업들이 이처럼 M&A에 열을 올리는 것은 서양 기업 인수를 통해 빠르게 선진 기술을 습득하고 세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다. KOTRA는 지난해 보고서에서 중국 기업들의 해외 M&A 열기에 대해 ‘역(逆)마르코폴로 효과’라는 용어를 만들어 붙이기도 했다. 700년 전 마르코폴로가 나침반 등 중국의 앞선 기술을 서양에 소개했던 것과 반대로 이제는 중국 기업들이 M&A를 통해 서양 기업들의 기술력과 경영 노하우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런 효과가 나타나는 데에는 최소 수년이 걸리는 만큼 아직까지 서구 기업 인수로 아시아 모기업의 기초 경쟁력이 단숨에 높아진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지리차의 경우 최근까지 지리차와 볼보 이사회가 중국 내 볼보 공장 3곳 신설을 둘러싸고 갈등을 벌였으며, 타타차의 경우 재규어 랜드로버 인수 직후인 2008년 2억4000만 달러에 이르는 부품구매 대금을 지급하지 못할 정도의 자금난에 빠지기도 했다. 도이체은행의 헨리크 아슬라크센 글로벌 M&A 책임자는 “신흥시장에서 M&A 거래는 문화 차이와 국제거래 경험 부족 등으로 장애에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지리차와 타타차는 “단기적인 재무 차익보다는 10년 이상의 미래를 내다보고 해외 기업 인수에 나선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타타차의 기리시 와그 승용차 부문장은 “2008년 경영 위기는 재규어 인수 때문이 아니라 세계 경제위기 탓이었으며 재규어 랜드로버를 가짐으로써 타타차는 전 세계 자동차회사와 경쟁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항저우(중국)·푸네(인도)=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 알 고팔라크리슈난 印 타타그룹 부회장 “우린 서양기업처럼 점령군 행세 않습니다”

알 고팔라크리슈난(고팔) 타타그룹 부회장(사진)은 24일 인도 뭄바이 시내에 위치한 타타그룹 본사 건물인 봄베이하우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그동안 (기업) 쇼핑을 많이 했고 이제는 이익을 창출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서양 기업처럼 점령군 행세를 하지 않는다”며 “바람직한 인수합병(M&A)에서는 인수하는 기업에도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전 세계에 39만 명이 넘는 직원이 있는 타타그룹에서 고팔 부회장은 지주회사인 타타손스의 부회장이자 계열사인 타타오토콤프 시스템스와 랄리스 인디아 사장, 타타케미컬 부사장 등을 겸직하고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타타그룹이 2000년 이후에 집중적으로 서양 기업들을 인수한 배경이 있나.

“1991∼2000년 인도 경제가 자유화되는 기간에 타타그룹이 크게 성장하고 재무적으로 탄탄해져 자금력을 갖추게 된 게 부분적인 요인이다. 기업이 커지면 세계시장에 나가는 것이 수순이고, 그렇게 되면 M&A도 하게 된다. 우리가 서양 회사만 사들인 것은 아니다. 한국의 대우상용차(현 타타대우상용차)나 싱가포르 태국 인도 국내 기업도 인수했고 태국에 픽업트럭 공장을 짓거나 모로코에 화학플랜트를 짓는 등 해외 투자도 많이 했다.”

―아시아 기업, 후발 업체로서 서양의 선진 기업을 인수할 때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

“그 질문에 깔린 가정을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기술이 어디가 앞서고 어디가 뒤졌다는 것은 언론의 선입견이다. 타타의 기술은 인도 시장에 맞는 것이었지 뒤처진 게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타타차는 하키를 잘했고, 대우상용차는 축구를 잘했으며, 재규어는 골프를 잘하는 식이었다. 우리는 이제 하키, 축구, 골프를 모두 잘하는 회사가 되려고 한다.”

―설득력은 있지만 동의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서양 현지의 반발은 없었나.

“서양 기업들은 다른 회사를 인수하고 나면 정복자처럼 구는데 우리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 우리는 한국에서 인도 기업이 아닌 한국 기업이 되고 싶고 영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타타 아래서도 재규어는 여전히 영국 브랜드다. 한편으로 우리로서는 M&A를 통해 외국 문화를 익히고 생각 자체를 더 글로벌하게 하면서 우리 자신을 개선할 수 있었다.”

―M&A를 더 추진할 분야가 있나. 타타그룹의 과제는 무엇인가.

“인도에서는 앞으로 5∼7년쯤 뒤면 군수산업 시장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 타타그룹은 1990년대에는 각 계열사가 재정적으로 건강해졌고, 그 다음 10년 동안에는 거대한 돈을 들여서 많은 회사를 인수했다. 이제는 거기서부터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쇼핑만 계속할 수는 없잖나.”

―M&A 이후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뭔가.

“크게 4가지 작업을 해야 하는데 기술 교류 등을 포함하는 비즈니스 통합, 비용 절감과 채무 축소, 그리고 문화적 통합이다. 남자가 여자와 결혼한 다음에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아내와 함께 살면서 문화적으로 통합하면 다른 여자를 만나러 나이트클럽에 가는 비용이 줄어들고 빚도 갚아나가게 되는 거다.”

뭄바이=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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