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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6월 16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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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익보다 소집단 이익 우선”… 각종 개혁과제 흔들려
남덕우 前총리 “고통 따르더라도 개방해야 문제해결”
계속되는 촛불시위가 만들어 낸 혼란스러운 정국을 틈타 대기업이나 공기업 노동조합이 ‘내 몫 늘리기’ 투쟁에 나서면서 경제 선진화가 후퇴할 위기에 처해 있다.
국제유가 폭등과 물가 상승, 성장률 저하, 고용 사정 악화와 소득 감소 등은 세계 모든 나라가 겪고 있는 고통이다. 하지만 소득 2만 달러가 넘는 나라에서 한국처럼 자유무역협정(FTA) 등 개방을 거부하는 ‘반(反)세계화’ 물결이 크게 소용돌이치는 곳은 거의 없다.
‘작은 정부, 큰 시장’, 공기업 민영화, 노동 유연성 제고, 교육정책 개혁 등 각종 개혁 과제가 변질된 촛불집회 앞에 흔들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자원이 부족하고 내수 시장이 빈약해 경제의 대부분을 교역에 의존해야 하는 한국에서 ‘반세계화, 반개혁’의 움직임이 심해지면 경제 선진화가 심각한 수준으로 후퇴할 수 있다”며 “국가 이익에 부합되는 합리적인 판단이 사회를 이끌어 가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 경제논리가 실종되고 있는 한국
최근 세계 경제를 덮친 경제 위기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물가는 급등하고 성장률은 떨어지는 스태그플레이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한국의 물가 상승률은 오히려 낮은 편이다. 4월 기준으로 주요국의 월별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보면 중국(8.5%), 싱가포르(7.5%), 홍콩(5.4%), 대만(3.9%), 미국(3.9%, 잠정치) 등이 한국(3.6%)보다 높다.
미국에서는 갤런(3.78L)당 휘발유 가격이 전국 평균 4달러(약 4160원)가 넘으면서 출퇴근용 기름값을 아끼기 위해 자발적인 명예퇴직을 원하는 사람이 생겨날 정도로 가계에 주름살이 늘고 있다.
전통적으로 물가 안정을 중시해 온 유럽권에서는 물가상승률이 각국 모두 20년래 최고 수준에 이를 정도로 심각하다. 유로화 강세로 그동안 유가 인상의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으나 최근 유가가 배럴당 130달러 이상으로 급등하면서 화물트럭 운전사들의 파업이 잇따르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인도와 베트남은 곡물수출금지 조치를 내렸고, 미국 의회는 대규모 자국 농업 지원법안 승인을 거론하는 등 반세계화 움직임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하지만 한국처럼 ‘경제논리 실종 현상’이 심각하게 벌어지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에는 ‘광우병 파동’이란 특수한 요인이 있었지만 쇠고기 수입 재개 반대 시위가 한미 FTA 반대는 물론 반미 시위로 이어지면서 일부에서는 폐쇄적 민족주의의 징후까지 나타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개방과 경쟁을 통한 경제발전’이라는 원칙이 이처럼 흔들리는 것은 노무현 정부 시절 경제규제, 균형발전, 교육평준화 등 이에 역행하는 각종 정책이 추진되었고 이에 편승하는 각종 이익집단이 확고한 세력을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반면 유럽은 2000년부터 사회복지모델 개편 및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구한 ‘리스본 어젠다’에 따라 대대적인 노동 개혁을 추진하고 있으며, 복지보다는 일자리 창출이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사회 전반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 덕분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지난해 4분기(10∼12월)부터 경제성장이 둔화됐는데도 실업률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상황이 힘들수록 개방을 거부하고 폐쇄 정책으로 눈을 돌리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만다”고 지적했다.
○ 작은 정부-공기업 민영화 추진 난항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성난 민심은 각종 개혁 과제의 추진마저 지지부진하게 만들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공공부문 슬림화 및 효율화→규제 완화→투자 활성화→일자리 창출→경제성장’이라는 선순환 구조의 경제발전을 위한 개혁 과제들을 준비해 왔지만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공기업의 방만 경영으로 국민적 지지를 얻었던 공기업 개혁은 후순위 정책으로 밀렸다. 공기업 개혁은 새 정부 출범 초기에 추진하지 않으면 점점 반발이 거세지고 정치적 판단이 개입돼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정부의 공기업 개혁 의지가 흔들리는 조짐이 나타나자 공기업 노조들은 투쟁 강도를 더욱 높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공기업 노조뿐 아니라 각종 노조들이 촛불시위대를 이용해 총파업 등 투쟁 강도를 높이고 있어 노동 유연성 제고라는 개혁 과제도 추진되기 어려운 분위기다.
프랑스 3대 경영자단체와 5대 노동단체가 최근 직업훈련과 보상금을 대가로 근로자의 채용과 해고를 쉽게 만드는 노동시장 유연화 안에 합의한 것이나 지난해 독일 폴크스바겐 노조가 7년간 고용 보장을 약속받고 임금을 9% 내리기로 한 노동 개혁과, 한국은 정반대로 가는 상황인 것이다.
○ “투쟁이 대화-타협 압도해선 안 돼”
이처럼 경제 선진화 후퇴 위기가 심화되는 원인에 대해 전문가들은 정부와 정치권의 갈등조정 능력이 떨어지면서 투쟁과 시위가 모든 문제의 해법이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또 법치가 실종되고 국가 이익보다 소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본말(本末)이 전도되는 상황 때문에 경제 선진화가 퇴보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많다.
인하대 정인교(경제학부) 교수는 “촛불집회가 처음 시작될 때는 광우병 우려가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한미 FTA뿐 아니라 정부의 공공부문 개혁에 대한 반대 등으로 주제가 확대된 양상”이라며 “이러다가는 규제 완화를 통한 경제 선진화나 장기적 성장기반 마련이라는 정부의 많은 계획이 큰 지장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서강대 김광두(경제학부) 교수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떨어졌다는 점이 가장 걱정스럽다”며 “제대로 된 인적 쇄신을 통해 이명박 정부가 다시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고, 새로 얻은 신뢰를 동력으로 삼아 선진화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신치영 기자 higgledy@donga.com
박용 기자 parky@donga.com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