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연못 속 큰 물고기’가 미니기업의 모델

  • 입력 2007년 3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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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부터 시작된 본보의 ‘세계 최강 미니기업을 가다’ 시리즈가 3월 15일 20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본보는 올해 신년특집의 하나로 대기업들과 어깨를 겨루며 세계 시장을 누비고 있는 해외 중소기업들의 성공비결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 이 시리즈를 기획했다.

특별취재팀 기자들은 한 달간의 사전 준비를 거쳐 지난해 12월부터 올 2월까지 미국 캐나다 유럽 일본 등 세계 14개 나라 26개 기업을 방문했고 이 가운데 12개국 20개 기업을 기사화했다.

취재 결과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전 세계 미니기업들은 끊임없는 연구개발(R&D)을 통해 독자 기술을 갖춘 뒤 대기업들이 넘보지 못하는 틈새시장을 공략하고 있었다. 또 유연한 조직과 경영혁신으로 고객을 감동시키는 제품을 만들고 있다는 공통점도 찾을 수 있었다.》

○ 틈새시장에서 성공

세계 최강의 미니기업 대부분이 틈새시장에서 차별화된 기술력으로 알토란 같은 실적을 거두고 있었다. 어느 기업을 가든 “우리는 대기업이 아니다”라는 현실 인식도 엇비슷했다.

덴마크의 성분 분석기 제조업체 포스사(社)는 세계 성분 분석기 시장의 85%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2000억 원대의 성분 분석기 시장은 대기업이 뛰어들기에는 규모가 작은 틈새시장. 포스는 이 틈새시장을 찾아 50년 넘게 세계 1위를 고수하고 있다.

대만 HYC는 세계 컨베이어벨트 시장의 2.5%를 차지하고 있는 미니기업. 하지만 우유 생산을 늘리기 위해 쓰이는 젖소용 물침대, 농산물 전용 무독성 컨베이어벨트 등의 틈새시장에서는 세계 1, 2위를 다툰다.

스위스 MBT는 신발을 팔아 지난해 60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냥 신발이 아니라 발이 편하면서도 운동 효과까지 있는 특수 신발이다. 한 켤레 30만 원 안팎의 고가(高價)지만 지난해에만 세계 20개국에서 200만 켤레가 팔려나갔다.

○ 기술개발로 승부

세계 최강의 미니기업들은 과감한 R&D 투자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확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교통단속기를 만드는 네덜란드 가초미터사는 연간 순이익 규모가 350만 유로(약 44억 원)인데 300만 유로(약 37억 원)를 R&D에 투자한다. 생산제품의 85%를 해외에 수출하지만 각국 현지에 별도의 판매조직을 두지는 않고 있다. 마케팅 비용 대신 기술력을 높이는 것이 장기적으로 회사 경영에 이익이 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기상관측기를 만드는 핀란드의 바이살라사는 해마다 연 매출의 15% 정도를 R&D에 쏟아 붓고 있다. 1980년 중반에는 R&D 비용이 연 매출의 25%에 이른 적도 있다.

오스트리아의 항공관제시스템 제조업체 프레크벤티스사의 경우 전체 직원 621명 중 엔지니어가 400여 명일 정도로 기술 중심 경영을 펼치고 있다.

○ 유연한 조직과 혁신적인 사고

보청기를 만드는 덴마크 오티콘사는 정해진 출근 시간이 없다. 업무에 방해를 받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율적으로 출근하면 된다. 게다가 퇴근 시간도 따로 없다. 늦은 밤까지 업무에 몰두하는 직원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직원들 간에 의사소통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무실 칸막이도 모두 없앴다.

네덜란드 가초미터사의 사무실 공간도 탁 트인 하나의 공간으로 돼 있다.

초소형 특수베어링 제작 기술을 가진 일본 북일본정기(精機)는 ‘홋카이도(北海道) 본사는 고부가가치 제품, 중국 상하이(上海) 공장은 범용 제품’이라는 이원 생산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지름이 2∼3mm에 불과한 초소형 모터를 생산하는 일본 시코엔지니어링은 ‘새로운 시장을 창조해야 한다’며 직원들에게 독창적인 사고를 강조한다. 그래서 회사 이름도 ‘시코(思考)’다.

고객 눈높이를 맞춘 제품 생산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 기업들도 적지 않다. 네덜란드의 요트 제조업체인 로얄 하위스만사는 요트 제작 전 과정에 고객을 참여시키면서 고객의 취향을 100% 반영한 제품을 만든다.

반도체 영상검사장비를 만드는 벨기에 아이코스비전사의 경우 연구원들이 시장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마케팅 회의에 참석시킨다.

○ ‘CEO 경쟁력’이 기업 경쟁력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한 미니기업에는 공통적으로 통찰력과 ‘장인(匠人) 정신’을 갖춘 최고경영자(CEO)들이 있었다.

금형 및 프레스 전문업체인 일본 오카노공업 CEO인 오카노 마사유키(岡野雅行) 대표는 철저한 장인 철학을 고집한다. 그는 “장인 세계는 오로지 기술로 인정받을 뿐 경영하는 사장은 필요없다”며 명함에 ‘대표사원’이라는 직함을 새기고 다닐 정도다.

스위스의 자동화 로봇 제조업체 귀델사의 루돌프 귀델 사장은 직접 작업복을 입고 공장을 누비며 제품 설계와 생산에도 참여한다.

전문 경영인도 10년 이상 재임하는 경우가 많다. 단기 성과보다 미래를 내다보는 경영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주 베가치즈의 해외영업담당 임원 모리스 반 린 씨는 1990년부터 2005년까지 15년간 CEO로 일한 뒤 지금은 해외영업을 전담하는 임원으로 물러앉았다.

<특별취재팀>

▽팀 장=임규진 경제부 차장

▽경제부=신치영 황진영

김창원 박용

김선우 손효림

김상훈 기자

▽정치부=박정훈 기자



■ 미니기업의 위기 대처법

지름 0.6mm의 초소형 특수베어링 분야에서 세계 시장의 70%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의 ‘북일본정기(精機)’.

일본에서 제조업 불모지로 인식되는 홋카이도(北海道)에 자리 잡아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창업 초기 일본의 관련 업체들은 “훗카이도에서 무슨 베어링이냐”며 거래를 꺼렸다.

북일본정기는 ‘기술’로 평가해 주는 외국 기업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국내 시장에서 인정받은 뒤 해외로 진출하는 대부분의 기업과 상반되는 전략을 펴서 어려움을 극복했다.

지금은 세계 최강 미니기업으로 성장한 회사들은 도전과 응전의 과정을 거쳤다.

창업 초기 자금 부족과 낮은 인지도 등으로 고전하기도 했고, 승승장구하다가 강력한 경쟁자의 출현으로 침체기에 접어들기도 했다.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회사가 존폐 위기에 내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기업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한 계단 더 도약했다.

세계 보청기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던 덴마크 오티콘은 1980년대 중반 ‘공룡 기업’ 지멘스가 보청기 시장에 뛰어든 후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다.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갖춘 지멘스는 귓속에 들어가는 초소형 보청기를 앞세워 빠르게 시장을 잠식해 갔다. 오티콘은 지멘스의 공세에 세계 보청기 시장 1위 자리를 내줬다. 시간이 갈수록 시장 점유율 격차는 더 벌어졌다.

1988년 오티콘의 ‘구원투수’로 영입된 라스 콜린 사장은 지멘스보다 더 빨리 신제품을 내놓은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설계, 생산, 마케팅, 판매 등의 부서에 소속된 직원들을 한 팀으로 만들어 신제품 개발을 한 뒤 해산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쏟아졌고, 제품 개발 기간도 단축됐다. 결과적으로 지멘스의 출현은 오티콘을 소비자의 요구를 가장 빨리 수용하는 회사로 만들었다.

개인용 컴퓨터(PC)의 파워 서플라이를 만드는 대만 탑파워는 1999년 ‘가격경쟁의 늪’에 빠지게 됐다. PC 제조 산업에 IBM, 컴팩 등 거대 기업들이 뛰어들면서 PC 가격이 크게 떨어진 것. 이들은 더 값싼 PC를 생산하기 위해 부품업체들로부터 더 싼 부품을 사들이고자 했다.

대만의 대부분 부품 업체가 출혈 경쟁을 시작했다. 많이 팔수록 손해가 커졌다. 탑파워의 저우칭린(周靑麟) 사장은 도박을 건다. 남들이 더 싸게 만들려고 혈안이 돼 있을 때, 더 비싼 제품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기술은 자신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광고할 돈이 없었던 탑파워는 기회가 되는 대로 선진국 컴퓨터 전문지의 성능 평가에 참여했다. ‘값은 비싸지만 성능만은 최고’라는 평가가 나왔다. 최고급 부품을 사서 직접 PC를 조립하는 컴퓨터 마니아들은 탑파워의 파워 서플라이에 열광했다. 저우 사장의 확신에 찬 도박은 탑파워의 체질을 바꿔 놓았다.

레이저를 이용해 지형을 측정하는 장비를 만드는 캐나다의 옵텍은 창립 첫해인 1974년 수심 측정 기구를 개발했다. 하지만 성능에 비해 가격이 너무 비싸 팔리지 않았다. 이 제품이 시장에서 인정받기까지는 10년이 걸렸다. 이 기간에 옵텍은 제품 생산은 하지 않고 정부나 기업체에서 발주하는 연구 용역을 수주하면서 버텼다.

옵텍은 ‘부업’으로 연구 용역을 수행하면서 이 장비의 성능을 꾸준히 개선해 나갔다. 창업 초창기의 고비를 넘긴 옵텍은 현재 세계 레이저 측정 장비 시장의 80%를 차지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 야심찬 취재… 뜨거운 반응

KOTRA 해외무역관 100곳서 추천

“벤치마킹 하고 싶다” 대기업도 관심

‘6만7000마일.’

이번 ‘세계 최강 미니기업’ 시리즈 취재를 위해 본보 특별취재팀 기자들이 다닌 거리다. 지구를 두 바퀴 반이나 돈 셈이다.

이번 시리즈에 소개된 20개 해외기업은 KOTRA와 본보 경제부의 까다로운 ‘예심’ 절차를 통과해야 했다.

우선 KOTRA의 전 세계 해외 무역관 100곳을 가동해 150여 개 기업을 추려 냈다.

이들 후보 업체를 놓고 본보 경제부가 다시 매출액, 세계 시장 점유율, 기술 경쟁력, 회사의 전통 등을 고려해 다시 20개 기업을 엄선했다.

이 시리즈가 연재되는 동안 독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특히 일반 소비자들이 직접 살 수 있는 소비재를 만드는 기업들이 소개된 뒤에는 독자들의 문의 전화가 줄을 이었다.

무릎이나 허리 통증이 있는 사람들이 치료용으로 신는 스위스 MBT의 ‘마사이 신발’이 보도된 1월 5일 본보에는 ‘마사이 신발을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를 문의하는 전화가 잇달아 걸려 왔다.

또 덴마크 보청기 제조업체 오티콘(1월 2일자), 체코의 욕실 매트 회사 그룬트(1월 3일자), 일본 무통주사기 제작업체 오카노공업(1월 25일자), 일본 초미니 베어링 제조사인 북일본정기(2월 8일자)가 소개된 뒤에는 무역회사와 병원, 관련 업체 등에서 “직접 물건을 수입하고 싶다”며 회사 연락처를 요구하는 전화와 e메일도 폭주했다.

‘세계 최강 미니기업’에 대한 관심은 대기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계적인 치즈 가공업체인 호주의 ‘베가치즈’(2월 1일자)가 소개된 뒤 국내 대기업 기획실의 한 관계자는 “그 회사를 벤치마킹하고 싶다”며 구체적인 자료를 요청해 왔다.

‘세계 최강 미니기업’은 ‘베스트셀러’를 찾는 출판사의 눈길도 사로잡았다. 출판 기획자들은 취재팀 기자들에게 e메일을 보내거나 친분이 있는 기자들을 통해 책으로 엮어 내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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