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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1월 6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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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경영진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않은 점만 인정되면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추세여서 앞으로 기업들의 ‘법률 리스크’가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이번 주주대표소송에 이어 올해는 이중대표소송제 등 개정된 상법이 도입될 예정이어서 기업들은 소송 부담에 따른 경영 위축을 우려하고 있다.
○ 위법행위 없어도 책임…경영 판단에도 법의 잣대
본보 취재 결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21부(부장판사 김재복)는 제일약품 소액주주 허모(59) 씨가 ‘대표이사 업무에 어긋나는 행위로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며 한승수 제일약품 회장을 상대로 낸 26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한 회장은 회사에 20억9000여만 원을 배상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최근 내린 것으로 5일 확인됐다.
제일약품 지분 1.01%(1만5000주)를 보유하고 있는 허 씨는 2005년 11월 “한 회장이 제일약품 대표로 재직하던 2003년 12월 당시 부실 자회사(제일메디텍)에 대한 자신의 보증 채무를 제일약품에 떠넘기는 방법으로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며 소송을 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자회사의 자금사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모회사가 연대보증을 설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막지 못한 것은 선량한 관리자로서 주의 및 충실의무를 위반(임무해태)한 것”이라며 “한 회장은 제일약품이 본 손실에 대해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제일약품은 판결문을 검토한 뒤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의 핵심은 재판부가 “한 회장이 상법 및 증권거래법상 구체적인 법령을 위반하지 않았지만 이사로서의 의무에 충실하지 못했다”면서 경영진에 회사에 대한 배상책임이 있다고 판단한 것. 회사 경영진의 배상책임 범위가 폭넓게 인정된 셈이다.
○ 줄 잇는 소액주주 승소…난감한 재계
지난해 8월 서울남부지법은 참여연대가 “회사 지분을 경영진과 사주(社主) 일가에 헐값으로 넘겼다”며 구본무 LG그룹 회장을 비롯한 LG화학 전현직 이사 8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구 회장 등은 회사에 400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LG그룹은 항소를 포기했다.
또 지난해 9월 역시 서울남부지법은 “대상그룹 비자금 조성으로 회사가 본 손해를 배상하라”며 소액주주 2명이 임창욱 명예회장 등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임 회장 등은 회사에 4억1200여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처럼 지난해부터 재판부가 주주대표소송에 대해 소액주주의 손을 들어 주면서 기업들은 앞으로 나올 판결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더구나 재판부가 경영진의 불법행위가 아닌 경영 판단에 대해서도 배상책임을 인정하자 난감한 표정이다.
현재 제일모직 전현직 경영진과 소액주주가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발행과 관련해 주주대표소송을 진행 중이다.
또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각각 현대중공업에 대한 부당 각서 작성과 현대상선 주식 저가(低價) 매각 등을 이유로 소액주주와 소송을 벌이고 있다.
○ 커져 가는 경영 위축 논란
주주대표소송에 이어 시기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올해는 이중대표소송제도도 도입될 전망이어서 경영 위축 논란이 커지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기존의 주주대표소송 외에 이중대표소송까지 도입되면 소송 부담이 커진 경영진의 경영 의욕 위축이 커질 수 있으며 기업의 독립 경영 원칙을 저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기업소송연구회 회장인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이중대표소송과 관련해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이사를 상대로 소송을 내면 오히려 자회사 주주들이 주가하락 등으로 손해를 볼 수 있다”며 “금융시장과 산업계에 미칠 부작용 등을 감안해 제도 도입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대기업 법무담당 임원은 “미국 등 선진국에선 기업과 경영진을 상대로 한 과도한 소송 증가 부작용이 심해지면서 회사 경영진의 책임을 완화하려는 입법까지 추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성호 법무부 장관도 4일 본보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무분별하게 기업들을 사냥하듯 소송을 남발하는 것에서 보호하기 위해 상법 등 관련 법률의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본보 5일자 A1·4면 참조
이에 대해 경제개혁연대 김영희 변호사는 “한 주만 갖고 있어도 소송을 낼 수 있는 미국과 달리 보유 지분 자격 요건이 까다로운 국내에서는 소송이 남발할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했다.
| 최근 제기된 주주대표소송 사례 | ||
| 피고 | 내용 | 결과 |
| LG그룹 구본무 회장 및 LG화학 전현직 이사 | 자회사 주식 저가 매각으로 끼친 손해 | 400억 원 배상 |
| 대상 임창욱 명예회장 | 비자금 조성으로 회사에 손해 | 4억여 원 배상 |
| 제일약품 한승수 회장 | 계열사에 자신의 보증채무 떠넘겨 회사에 손해 | 20억9000여만 원 배상 |
| 제일모직 이사 및 감사 |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실권 책임 | 대구지법 계류 중 |
| 현대증권 이익치 전 회장 | 현대중공업에 부당 각서 써줘 회사에 손해 | 서울중앙지법 계류 중 |
|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 | 현대상선 자사주 저가 매각으로 회사에 손해 | 서울중앙지법 계류 중 |
| 이중대표소송제 쟁점 | |
| 당초 정부안 | 문제점 및 재계 요구안 |
| -발행주식 총수의 1% 이상을 보유한 모회사의 주주가 자회사 이사의 책임을 대표소송을 통해 물을 수 있는 제도 -상법상 모자회사관계(50%를 초과하는 지분을 가진 회사)에 대해서만 적용 | -이사의 책임부담 증가로 위험 회피적 경영 초래 -적용 범위가 넓고 소송 대상이 많아 남소의 소지 -모회사와 자회사 간 독립된 법인격의 부인 -이중대표소송제 철회 요구 |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주주대표소송제도: 경영진이 주주의 이익에 어긋나는 경영 판단을 내렸을 경우 주주가 회사를 대신해 경영진에 소송을 제기하는 제도.
:이중대표소송제도: 모(母)회사의 주주가 자(子)회사 이사의 위법행위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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