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당당하게… 모던하게… 전통의 브랜드 화려한 부활

  • 입력 2006년 1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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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연기자
원대연기자
‘빈센트&코’는 가짜였다. 스위스 명품은커녕 ‘메이드 인 시흥’이었다. 그런데도 몇백만 원짜리 시계가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단다.

명품 마니아라는 두 여성에게 이 어이없는 사건에 대해 물었다.

A(26·대기업 근무): “나도 명품을 꽤 좋아하지만 그런 브랜드가 있는지 몰랐어. 백화점엔 없었잖아.”

B(37·패션 홍보): “큰일 날 뻔했어. 아는 사람 통해서 싸게 사려고 했거든. 뱀가죽이 특이하고, 청담동 미용실 원장님이랑 몇몇 연예인이 좋아한다고 하기에….”

빈센트&코의 영악한 사기꾼은 B와 같은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해 재미를 볼 수 있었다.

‘신(新)명품 고수’들은 △고수끼리만 알아본다는 자부심(한국에 소개된 지 얼마 안 됐음) △독창성(뱀가죽) △출신 배경(메이드 인 스위스) △권위 있는 보증인(연예인, 스타일리스트, 미용실 원장 등)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런 기준이 때로는 빈센트&코의 사례처럼 ‘엉터리 브랜드의 성공 신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B는 ‘작 포센’ 드레스와 ‘데렉 램’ 가방, ‘지미 추’의 하이힐을 사랑한다. 이런 제품은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브랜드 정보력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정보가 있다는 건 ‘명품 고수’의 이너서클에 속하는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A는 어디에 속할까.

평범한 직장인인 A는 매월 10만∼20만 원씩 3개월 무이자 할부로 살 수 있는 브랜드를 선호한다. 그래도 어머니 세대가 쓰던 ‘버버리’ 체크무늬 백은 싫다. ‘코치’나 ‘DKNY’가 더 좋다. 기존 고가 브랜드보다 값은 싸도 신선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매스티지(대중적인 고급제품)’ 브랜드를 갖고 싶어 한다.

A와 B는 2000년대 들어 급부상한 ‘뉴 럭셔리족’. 이들은 세계 럭셔리제품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며 새로운 시장을 창출했다. A는 시장을 아래로 넓혔고 B는 틈새시장의 주인공이 됐다. 그렇다면 기존 럭셔리 시장의 터줏대감들은 어떻게 됐을까.

‘시장을 읽는 자가 성공한다’는 불변의 법칙에 따라 이들의 운명도 갈렸다. 변화를 감지한 브랜드는 뉴 럭셔리족의 도전을 압도하며 시장을 주도했다. 반면 과거의 영화에 집착한 브랜드는 그만큼 세(勢)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럭셔리계의 경쟁에서 밀리는 듯했던 올드 브랜드들이 역습을 꾀하고 있다. 이들은 단골 고객을 지키면서 A와 B 같은 소비자도 두루 포섭한다는 전략에 따라 새로운 ‘얼굴마담’을 발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 럭셔리, 소비자 곁으로

10월 26일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명품관 에비뉴엘 3층의 ‘발리’ 매장. 스위스 브랜드 발리의 마르코 프란치니 사장은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나타났다.

늦은 이유는 간단했다. 신라호텔 면세점 매장을 둘러보다 직원들에게 너무 많은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란다.

프란치니 사장은 “현장에서 고객이 우리 브랜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세계 주요 매장을 방문하고 있다”면서 “각 시장의 특성을 알아야 향후 제품 디자인과 브랜드 가치 설계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뉴 럭셔리族을 열광시켜라

이탈리아 브랜드 ‘미소니’ 창립자의 아들이자 최고경영자(CEO)인 빅토리오 미소니도 최근 방한해 한국 시장을 둘러봤다.

지난달에는 이탈리아 브랜드 ‘페라가모’ 창립자의 손자인 살바토레 페라가모가 한국을 찾았다. 와인 ‘일 보로’의 론칭이 방한 목적이었지만 청담동 페라가모 매장에서 열린 구두 제작 행사에도 참석해 한국 시장에 대해 큰 관심을 나타냈다.

사실 글로벌 기업의 CEO가 시장을 찾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럭셔리 브랜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원래 럭셔리 브랜드는 소수 상류층만 상대해 왔다. ‘뭘 원하는지 묻지 말고, 그들이 뭘 가져야 하는지 보여주라’가 럭셔리 비즈니스의 원칙이었다.

과거 중산층은 상류층의 소비 패턴을 모방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미국과 아시아는 유럽의 트렌드를 충실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가 되면서 ‘지식쇼핑’으로 무장한 중산층 소비자들은 트렌드를 ‘응용’하기 시작했다. 예전의 중산층보다 소득 수준도 높아졌다. 비슷한 만족을 주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하거나, 아예 독특한 것을 원했다. 값비싼 프랑스 와인의 대안으로 미국산과 칠레산이 인기를 끈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

럭셔리 브랜드들이 다양한 소비자 집단의 욕구를 정확히 파악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시장 변화에 재빨리 적응한 브랜드로는 미국의 코치가 꼽힌다. 지난해 전략컨설팅업체 베인&컴퍼니가 낸 ‘명품 시장의 새로운 규칙’ 보고서에 따르면 코치는 신소비층을 집중 분석해 18∼24세의 젊은 고객을 1996∼2001년에 두 배로 늘렸다.

일부 올드 럭셔리 브랜드들은 특정 지역의 상황에 맞춘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페라가모는 “한국 여성의 피부색에 어울리는 제품”이라며 한국 판매용으로 핑크색과 라일락색의 ‘브레이’와 ‘비와’ 구두를 내놓았다. 페라가모 코리아 최영경 차장은 “한국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 본사에서 특별히 제작한 것”이라고 했다.

루이비통은 일본 도요타자동차를 모델로 삼아 “품질도 우수하면서 생산성도 높은 명품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루이비통은 20∼30명의 장인이 수작업으로 8일 걸리던 것을 하루로 줄이는 생산 공정의 혁신을 꾀하고 있다. 명품의 자부심으로 통했던 ‘웨이팅 리스트(대기 명부)’를 포기하겠다는 의미다.

루이비통 관계자는 “고객들은 원하는 물건이 매장에 있길 원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새 얼굴을 찾아라

“그 악마가 컬렉션 프리뷰에서 웃은 것은 한 번뿐. 2001년 톰 포드의 컬렉션을 봤을 때였다.”

최근 개봉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한 장면. 여기서 ‘악마’는 세계 패션계를 쥐락펴락하는 미국 패션 잡지사의 편집장 ‘미란다’를 말한다.

까다로운 미란다도 만족할 만한 컬렉션을 선보인 톰 포드는 미국의 스타 디자이너. 영화배우 뺨치는 준수한 용모로 여성 팬이 유독 많다.

무엇보다 1994년 31세의 젊은 나이에 파산 위기에 놓인 구찌를 화려하게 부활시켜 유명해졌다. 당시 73세이던 구찌를 23세로 회춘시켰다는 평을 받았다.

콧대 높은 프랑스 브랜드 루이비통도 1998년 35세의 미국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를 기용해 제2의 도약을 이뤄냈다. 그는 루이비통이 수십 년간 고수했던 모노그램 로고 백에 체리, 그라피티(길거리 벽화그림) 무늬 등을 그려 넣어 순식간에 뉴 럭셔리족을 사로잡았다.

리딩 브랜드의 선전에 자극받은 다른 터줏대감들도 앞 다퉈 새로운 얼굴을 만들고 있다.

미소니는 화려한 색감의 니트로 유명한 이탈리아 브랜드. 100m 앞에서도 알아볼 만큼 브랜드 정체성이 뚜렷하다.

뚜렷한 정체성이 돈을 벌어주지만 때로는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아 성장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미소니는 새로운 럭셔리 소비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에스티 로더와 손잡고 젊은 감각의 향수를 선보였다. 특히 향수 모델로 창업자의 손녀인 마르게리타를 내세워 화제가 됐다.

CEO인 빅토리오 미소니는 “조카딸 마르게리타는 뉴욕에 사는 24세의 모던한 여성으로 미소니가 추구하는 브랜드 이미지에 딱 맞는다”고 말했다.

페이즐리 무늬로 유명한 이탈리아 브랜드 에트로는 오히려 페이즐리 무늬를 줄여 가고 있다. 독창성을 즐기는 신세대 명품족에 어필하기 위해서다.

편안하고 실용적인 신발로 150여 년 역사를 지닌 발리도 섹시한 오피스 레이디풍 의류를 내놓고 이미지 변신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글=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名家의 변신 ‘젊게 산뜻하게 색다르게’

○ 발리 CEO 마르코 프란치니

“스타 디자이너 기용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창의성이 필요하니까요.”

스위스 브랜드 발리의 CEO인 마르코 프란치니(49·왼쪽) 사장은 브랜드 관리의 ‘마술사’로 불린다. 그는 1994년부터 2002년까지 구찌의 유럽시장을 총괄하며 구찌의 화려한 부활을 이끌었다.

프란치니 사장은 “스타 디자이너는 본인의 이미지가 강해 오히려 브랜드의 개성을 묻히게 하는 단점이 있다”면서도 “5년간 발리의 정체성을 살리는데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이제는 뉴 페이스를 영입할 적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발리는 스위스의 리본 제조업자인 카를 프란츠 발리가 1851년에 만든 브랜드. 편안한 고급 구두로 유명하다.

프란치니 사장은 변화는 필요하지만 너무 급격한 변화는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발리 고유의 이미지를 믿는 핵심 고객을 지켜 나가면서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브랜드로 발전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발리는 올 가을 악어나 모피 등 고급 소재를 사용해 화려한 럭셔리 스타일을 ‘발리스럽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 미소니 CEO 빅토리오 미소니

“미소니를 만화경(萬華鏡) 같은 브랜드로 만들고 싶습니다.”

올 8월 화려한 색채의 니트로 유명한 미소니의 청담동 플래그십 스토어가 재단장을 마치고 문을 열었다. 고객들이 미래의 트렌드를 느낄 수 있게 하자는 취지로 새로 꾸몄다.

미소니 창립자의 맏아들이자 CEO인 빅토리오 미소니(오른쪽)는 리뉴얼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타깃 연령을 낮추고 신선한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 시점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리뉴얼한 것”이라며 “컬러를 기본으로 다양한 콘셉트를 보여주는 브랜드를 추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소니는 지난달 24일 청담동 새 매장에서 열린 2007 봄·여름 컬렉션 프리뷰 파티의 메인모델로 탤런트 오윤아를 선정했다. 젊어지는 미소니 스타일을 알리기 위해서다. 미소니 CEO는 “럭셔리 브랜드의 기본은 제품의 질”이라며 “중국에서 대량생산을 하는 브랜드도 있지만 우리는 기본에 충실하기 위해 이탈리아 생산을 고집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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