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3년 11월 4일 18시 32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A은행은 지난달 명예퇴직 신청을 받았다. 대상은 부부장 또는 부지점장급 이상 전원, 만 43세 이상 차장 및 과장, 만 38세 이상 대리 및 행원 등 3450명.
겉으로는 자발적인 명예퇴직. 그러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과를 기준으로 한 인력조정이다. 인사팀이 고과가 좋지 않거나 징계를 받은 직원 등 100여명의 리스트를 만들어 개별적으로 명예퇴직 대상자라는 사실을 통보해 사실상 퇴직을 종용한 것.
우리은행측은 “자발적인 신청자가 워낙 적어 인사팀이 작성한 대상자에게 명예퇴직 신청을 하도록 설득했다”고 설명했다.
1998년 연봉제를 도입하고 상시 구조조정을 실시하고 있는 B화장품은 올해 전 직원의 25%가량인 250여명이 회사를 떠났다. 상반기 매출이 40%가량 줄어들자 인력삭감에 들어간 회사측은 고과를 기준으로 사무직과 생산직 인력을 영업직으로 재배치해 퇴직을 유도했고, 고과가 나쁜 직원 30명은 아예 재계약 대상에서 배제했다.
B화장품 관계자는 “합리적인 다면평가를 통해 연봉 재계약과 인력 배치를 하기 때문에 인력 조정에 대한 반감이 크지 않다”고 말했다.
이런 변화에 대해 삼성경제연구소 강우란 박사는 “외환위기 이후 인력삭감이 거듭되면서 나이를 기준으로 한 인력삭감은 조직원의 충성도를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기업이 체득했다”며 “고과가 인력삭감의 기준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과를 기준으로 한 인력삭감은 저항도 덜하다. 외환위기 이후 대부분의 기업들이 주먹구구식 인사고과제도를 버리고 실적과 역량을 기준으로 측정한 고과자료를 축적해 왔기 때문.
최근 명예퇴직을 실시한 C증권은 부장 및 차장급 60명을 삭감했다. 인사팀 임영재 과장은 “고과자료를 토대로 구조조정을 하기 때문에 당사자들도 ‘이 조직에서 클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큰 마찰이 없이 구조조정을 마무리했다”고 말했다.
고과평점은 자발적인 퇴직을 유도하는 기능도 한다.
6월 전 직원을 대상으로 명예퇴직을 실시한 D카드는 750명의 모든 직원에게 5등급으로 평가한 고과성적을 e메일로 보냈다. 그동안 비공개였던 고과자료를 처음으로 각 개인에게 통보한 것.
삼성전자의 한 직원은 “본인에게 고과 내용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수년 연속 하위등급을 받을 경우 스스로 짐을 싸게 된다”고 밝혔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재원 박사는 “고과를 기준으로 한 인력구조조정이 일상화되면서 실직연령이 30대 중반까지 낮아지고 있다”며 “중장년층 위주로 짜여진 정부의 재취업 프로그램의 조정이 필요하며 기업은 인사고과의 객관성이 중요 이슈로 떠오를 것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박 용기자 arky@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