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신뢰경영]<6>스웨덴 재벌기업 사회적 신망 두터워

  • 입력 2003년 5월 11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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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지배구조는 그 기업이 속한 나라의 금융 및 산업시스템과 정부와의 관계를 반영한다. 북유럽 국가 스웨덴은 재벌기업과 사회민주주의 정부의 동거(同居)라는 독특한 모델을 갖고 있다. 은행에서 분리된 투자회사들이 스웨덴계 다국적기업들을 키우고 지배하며 이 기업들이 국가의 파트너로서 산업정책에 협조해왔다. 과거에는 중공업과 전자산업, 지금은 첨단기술과 정보통신 사업 분야의 거대 스웨덴 기업들이 이러한 배경에서 자라났다. 기술개발과 교육에 대한 국가적 열정이 대단하다.》

인베스터의 차등의결권 현황
기업소유지분의결권
에릭슨5%38%
사브20%36%
스카니아9%15%
SEB20%21%
ABB10%10%
아스트라5%5%
아틀라스콥코 15%21%
일렉트로룩스 6%24%

흥미로운 것은 에릭슨(통신), 사브(자동차, 비행기 엔진), ABB(엔지니어링), 스카니아(트럭), 아스트라(제약), 일렉트로룩스(가전), SEB(금융)와 같은 세계적 기업들이 발렌버그라는 한 재벌 가문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 이들 외에도 이케아(가구), 볼보(자동차와 트럭·자동차는 미국 포드에 인수됨), H&M(의류), 스칸디아(보험), 텔라(통신) 등이 ‘작은 나라’ 스웨덴이 배출한 ‘큰 기업들’이다.

발렌버그 가문이 지배하는 투자회사 인베스터는 ‘차등 의결권’ 제도를 통해 핵심 기업에 대한 경영권을 유지하고 있다. 인베스터가 경영권을 행사하는 기업들의 시가총액은 스톡홀름 주식시장 전체의 50%를 넘는다. 경제력이 이처럼 소수에 집중되어 있지만 불만은 그리 크지 않다.

발렌버그 가문이나 스웨덴의 세계적 의류사 H&M의 페르손가(家)에 대해 스웨덴 국민의 신뢰는 강하다.

▽변화의 물결=세계 최고(最古)의 역사를 자랑하는 통신사 에릭슨은 극단적 차등의결권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주당 1표의 의결권을 갖는 A주식과 주당 1000분의 1표 권한만 갖는 B주식이 그것. 지주회사 인베스터와 특수관계인들은 에릭슨에 대해 8%의 지분으로 85%의 지배력을 행사한다.

1980년대 이후 탈(脫)규제와 경제자유화 프로그램이 각 부문에 걸쳐 광범위하게 진행되었지만 전(前)근대적으로 보이는 이 차등의결권 제도는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정부의 개혁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리프 파그로츠스키 스웨덴 산업부 장관은 “기업이 상장되더라도 대주주의 자금이 계속 기업에 유입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오너들이 기업의 장래에 대해 원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밝혔다.

물론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제시하는 ‘주주 평등권’ 원칙을 정면 거부하는 것이어서 미국 월가 등 자본시장 참여자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또 스웨덴 기업에 대한 증권투자의 매력을 줄여 직접금융시장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금융시장의 국제화는 스웨덴식 관행을 바꾸고 있다.

칼 로슨 ‘노르딕 인베스터서비스’ 전무는 “에릭슨이 작년 주식시장에서 30억달러를 조달하면서 차등의결권 제도를 개선하기로 약속했다”며 “인베스터의 핵심 계열사인 일렉트로룩스도 몇 년 전에 자발적으로 1000대 1의 차등의결권 제도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비즈니스 위크는 “소유권을 스웨덴인의 손에 두려는 노력은 자칫 에릭슨을 질식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소유구조를 바꾸는 것이 궁극적으로 높은 수익을 가져올 수 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 정광선 원장(중앙대 교수)은 “최근 국내에서 ‘경영권 지키기’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지만 한국이 이 제도를 본뜨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리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말했다. 다만 기업과 대주주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를 보고 배우라는 것.

▽변함없는 신뢰=인베스터의 대표인 마르쿠스 발렌버그는 기자에게 “지주회사가 받는 배당금의 절반 이상은 재단을 통해 학교와 과학기술연구소로 환원된다”며 “기업은 우호적 사회환경 속에서 비즈니스를 해야만 이익이 남는다”고 말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도 “스웨덴과 미국이 기술강국으로 부상한 데에는 대학 및 연구기관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스웨덴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 소프트웨어 및 고등교육에 투자하는 비용이 6.5%로 세계 최고라고 OECD 보고서는 밝힌다.

소액주주의 발언권을 결코 막으려 하지 않고 스웨덴 기업의 회계보고서는 투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주총 다음날인 4월9일 스톡홀름 외곽 에릭슨 본사를 방문한 기자에게 피아 기데온 대외관계 부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3000명의 주주가 체육관에 모여 6시간 동안 격론을 벌였다. 어떻게 해야 에릭슨이 지난 2년간의 부진을 딛고 다시 뻗어나갈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개진했다. 스웨덴 인구 800만명 중 100만명이 에릭슨의 주주이다. 연기금을 통해 간접투자하는 사람들을 포함하면 사실상 모든 스웨덴 국민이 에릭슨의 주주라 할 수 있다. 에릭슨은 스웨덴의 자존심이다.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익을 창출할 것)이다.”

에니카 렘브 스웨덴 투자청 대외관계 최고책임자는 “정부는 각 분야에 걸친 탈규제와 자유화를 통해 사회의 생산성을 높였고, 노조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서 “노조는 기업이 발전하지 않으면 고용창출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업의 신기술 도입과 노동력 절감 투자사업에 적극적”이라고 말했다.

정부와 기업의 협력관계, 협조적 노동환경, 기술개발에 대한 과감한 투자 결과는 높은 생산성이다. 미국 노동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스웨덴은 과거 10년간(1990∼2000년) 생산성 증가율이 가장 높은 국가로 4.7%의 생산성 증가율을 기록했다. 스웨덴 이외에 미국과 프랑스만이 4%가 넘는(각 4.1%) 생산성 증가율을 보였다.


스톡홀름(스웨덴)=김용기기자 ykim@donga.com

▼지주회사 인베스터 CEO 발렌버그 ▼

작은 나라에 기반을 둔 지주회사가 글로벌 시대에 펼치고 있는 경영방식은 흥미로웠다. 한국 최상위 3, 4개 재벌그룹 회장들을 합친 만큼 스웨덴 경제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마르쿠스 발렌버그(사진)와의 인터뷰 성사를 알려주면서 스웨덴 외무부 관계자는 기자에게 “지난 20년간 한국 언론과 발렌버그와의 만남은 없었다”고 말했다.

발렌버그 가문의 후계자이자 북유럽 국가 중 가장 큰 산업지주회사 인베스터의 최고경영자(CEO)인 그는 ‘장기적이고 헌신적이며 책임있는 경영’과 ‘산업 및 금융경쟁력을 가진 독특한 국제적 네트워크’라는 두 가지 요소로 인베스터의 경영방침을 요약했다.

인베스터의 지배구조는 하나의 근본적 원칙에 기반하고 있다. 각 기업의 필요성과 구체적 환경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것. 지주회사는 1∼3명의 이사를 계열사에 파견한다. 이들은 해당 계열사 이사회 의장과 부의장으로 일하며 경영진의 조언자와 토론자 역할을 한다.

핵심 애널리스트들이 이들 기업을 살피고 분석하며, 이들 기업의 경쟁사들과 시장상황을 점검한다. 파견된 이사들과 팀을 구성해 토론한다.

인베스터는 국제적 네트워크를 구성해 신규투자 사업을 발굴한다. 지주회사는 신규투자회사의 발전단계에 맞추어 근본적인 전략, 비즈니스 모델 창출, 올바른 조직구조를 갖추는 데 도움을 준다. 현재 약 150개 기업에 신규투자하고 있다. 중국과 한국 대상, 성장기업 대상, 북유럽 중견기업대상 펀드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다.

다음은 발렌버그씨와의 일문일답.

―에릭슨의 차등(差等)의결권 제도의 비판에 대해….

“코카콜라, 월트 디즈니를 포함해 미국에서도 400개가 넘는 기업이 차등 의결권 제도를 유지한다. 그간의 전통, 배경, 각국 경제가 안고 있는 고민들을 완전히 무시해선 안 된다.”

―인베스터의 역할은….

“장기적 비전을 가지고 기업경영에 관여한다. 기업은 좋은 시절도 있고 나쁜 시절도 겪는다. 나쁘다고 해서 팔아치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기업의 이해(利害)와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추나.

“무엇이 개개 기업의 이익에 가장 올바른가를 생각하고 판단한다. 스웨덴 내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게 국가 차원에서는 좋다. 하지만 기업으로서 바깥으로 옮겨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낄 때도 있다. 최근 인베스터가 관할하는 핵심 기업들 중 몇 개가 외국회사와 합병한 후 그 본부가 국외로 옮겨간 일이 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은….

“산하 펀드를 통해 중국과 한국에 중점적으로 투자할 생각을 갖고 있다. 한국은 국제화가 돼있고 우수한 노동력뿐 아니라 지속적 성장을 위한 정부의 결의가 인상적이다. 제조업, 국내 소비와 서비스업, 비은행 금융회사 등에 투자할 관심을 갖고 있다.”

스톡홀름(스웨덴)=김용기기자 ykim@donga.com

▼<특별취재팀> ▼

▽팀장=허승호 경제부 차장

▽팀원=김용기 신연수 이강운 공종식 정미경 박중현 김두영

홍석민 기자(이상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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