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 국가리스크]<상>악재…지금 손안쓰면 늦는다

  • 입력 2003년 3월 14일 19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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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리스크(위험)가 쌓이면 경제위기가 마침내 닥친다. 올 들어 북핵, 미국-이라크 전쟁 조짐 등 외부 위험과 가계대출 부실, 불투명한 기업회계, 경기침체 등 내부 위험이 한꺼번에 겹치고 있다. 이 때문에 외평채 가산금리, 주가, 원-달러 환율 등 경제지표가 요동을 치고 있다. 위험의 크기와 강도를 줄여야 하는 국가 차원의 리스크 종합관리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지표 불안을 그대로 방치하면 97년 외환위기 때처럼 리스크끼리 상호작용이 일어나면서 진짜 위기국면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외, 금융, 실물, 정치, 사회 부문이 모두 다 위험수위다. 무분별한 대책으로는 위험이 해소되지 않는다. 위기가 현실화하면 종전 외환위기 때보다 피해가 크고 회복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최공필·崔公弼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국내외 금융시장의 각종 지표가 좋지 않다. 아직 위기는 아니지만 위기를 걱정하는 전문가들의 우려는 높아지고 있다.


▽국가리스크 총량이 늘었다〓14일 홍콩, 뉴욕시장에서 외국환평형기금채권 금리가 전날보다 0.1%포인트 정도 떨어지자 한국은행 외환모니터링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은 관계자는 “외평채 가산금리에는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위험에 대한 외국인투자자들의 평가가 모두 들어있다”며 “대외요인인 북핵 문제에 SK글로벌 분식회계로 대내요인 위험마저 가세하면서 국가리스크 총량이 커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북한 핵 문제와 미국-이라크전쟁으로 지정학적 위험은 이미 최고수준에 달했다는 게 한은의 분석.

문제는 가계대출 부실, 새 정부의 불확실한 정책,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 같은 내부변수의 위험도 만만치 않다는 점. 1997년 외환위기는 내·외부 위험요인이 한꺼번에 찾아오고 정부가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면서 일어났다.

외국계 증권회사에 근무하는 A씨는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이 많이 나아진 것으로 생각했는데 SK사태를 통해 완전히 허상이었음이 드러났다”며 “금융부문은 단기부동화가 심화하고 금융기관의 자금중개기능이 거의 마비됐다”고 지적했다.

건실한 기업은 은행돈을 쓰지 않고 가계 등 특정 부문에만 돈이 몰리면서 가계부채가 경제 전체에 큰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동산값이 떨어진다면 금융부문 부실로까지 이어진다.

실물 부문은 산업양극화와 공동화로 기초체력이 매우 부실해진 상태. 정부가 이런 구조적 위험을 도외시한 채 수치만 괜찮다고 하는 것도 위험요인이다.

대외 부문은 더욱 나쁘다. 북한 핵 문제, 미국-이라크전쟁, 세계경제 침체 등 악재가 쌓이면서 금융시장에 충격을 주고 수출도 어려워지고 있다.

홍익대 김종석(金鍾奭·경제학) 교수는 “거시경제지표는 괜찮은 편이지만 과거 외환위기가 단순히 지표가 나빠서 온 것은 아니다”라며 “한보, 기아 문제 등을 시장원리에 따라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해 외국자본이 빠져나갔다”고 강조했다. 위험관리 능력이 모자랐다는 것.

▽냉혹한 국제금융시장〓시중은행 관계자는 “국제금융시장은 모든 위험에 즉각 냉혹하게 반응한다”며 “국가신용등급이 투자부적격으로 떨어지면 그나마 거래도 이뤄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의 신용등급이 떨어지자 국제 빚쟁이들은 일제히 정부보증, 고금리, 만기연장 거부, 조기상환 등을 요구해 왔다. 새로 돈을 빌리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모든 위험을 반영하는 국가신용등급은 투자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투자기준인 동시에 투자대상국에 대해서는 얼굴과 같은 역할을 한다. 한번 결정된 신용등급은 국제금융거래에 즉각 반영된다. 국가신용등급이 한 단계 내려가면 외자 조달금리는 보통 0.05% 정도 오른다.

위험 축적은 지표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나타난다. 지난해 말 대부분의 국내외 경제전망기관은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5%대로 예상했지만 올 들어 3∼4%대로 낮췄다. 한국경제연구원은 미국-이라크전쟁과 북한 핵 문제가 장기화하면 올해 성장률이 1.4%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가신용위험 스와프금리(CDS)가 2.0%, 외평채 가산금리는 1.7%대에서 여전히 고공비행을 계속하고 있다.

홍익대 김 교수는 “외국인투자자들이 한국 경제에 대한 신뢰를 잃어간다는 점에서 현 상황은 위기에 가깝다”며 “국가위험도가 높아지면서 가산금리가 폭등하고 은행들이 해외시장에서 단기외채 차입을 포기하거나 실패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대외지불 능력이 충분하고 기업의 부채도 적은 편이어서 정부가 리스크 총량 관리에 적극 나선다면 실제 위기는 충분히 피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임규진기자 mhjh22@donga.com

천광암기자 iam@donga.com

▼97년 외환위기의 경우▼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를 촉발한 직접적인 계기는 그해 7월 태국 바트화 폭락으로 시작된 동남아시아의 금융위기였다. 10월 인도네시아가 국제통화기금(IMF)에 자금지원을 요청하고 23일 홍콩증시가 하루 만에 10.4% 폭락했다.

이 여파로 외화자금은 썰물같이 한국을 빠져나갔고 국내 기업들의 해외 돈줄은 막혀 버렸다. 마침내 11월21일 한국 정부는 IMF 구제금융 신청을 전격 발표했다.

하지만 동남아의 외환위기 전염은 조그만 충격파일 뿐이었다. 이미 한국 경제는 빚투성이인 기업의 재무구조, 관치(官治)에 찌든 낡은 금융시스템, 펀더멘털이 튼튼하다고 외치고만 있던 안이한 정부 등 곳곳에 위기의 ‘덫’이 깔려 있었다는 게 경제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재정경제부는 ‘IMF 5년의 성과와 과제’라는 공식보고서에서 “97년 외환위기는 지난 30여년간 이룩한 고도 성장 이면에 누적된 경제 사회 각 부문의 구조적 문제가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90년대 이후 세계 경제환경 변화, 즉 신자유주의라는 세계화의 흐름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해 국제경쟁력이 약화됐다”고 설명했다.

당시 기업들은 은행돈을 끌어다 외형 불리기 경쟁을 벌여왔다. 기업부실은 점점 커졌고 이는 금융부실로 곧바로 이어졌다. 97년 당시 한국 제조업체의 부채비율은 396.3%. 미국의 153.5%는 물론이고 비슷한 경제구조인 일본(193.2%)이나 대만(85.7%)보다 훨씬 취약했다.

여기에 자본시장은 급속히 개방되고 금융자율화가 진행됐지만 이에 맞는 금융감독체계는 미흡했다.

이런 허약한 기초 위에 94년 이후 경상수지 적자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특히 96년에는 반도체가격이 폭락하면서 한 해 동안에만 230억달러의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를 냈다. 환율은 97년 9월 말 현재 달러당 915원으로 경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해 경상수지 적자를 더 키우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에 따라 97년 9월에 224억달러였던 가용(可用) 외환보유액은 불과 두 달여 만에 39억달러로 줄어들었다.

주가는 97년 8월 750선이었다가 12월27일 350선으로 주저앉아 넉 달 만에 400포인트가 빠져 기업들의 돈 가뭄이 더욱 심해졌다.

당시 한국 경제의 리스크는 단순히 경제분야에만 쌓여 있던 것이 아니다. 정치권의 리더십도 심각한 위기 수준이었다.

한보 기아의 부도로 경제가 휘청거렸지만 정치권과 정부는 서로 이견을 드러내 이의 처리가 지연되고 있었다. 노동법 개정 날치기 파동 등으로 일련의 경제개혁정책들이 표류했다.

결국 무디스는 한국의 국가신용평가 등급을 A1에서 Ba1으로 6단계,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AA-에서 B+로 무려 10단계나 떨어뜨렸다.

김광현기자 kkh@donga.com


▼경제위기 어떻게 오나▼

경제위기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다가온다.

특히 지금처럼 외국과의 경제교류가 활발하면 국내외 경제요인이 상호작용을 일으킨다. 또한 금융시장은 시장 참가자들의 심리적 요인에 따라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므로 정부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현재 국내적인 요인은 가계부채가 가장 걸린다. 가구당 가계부채가 3000만원에 이르는 상황에서 경기침체는 전반적인 가계소득의 감소로 이어진다.

금융연구원 박종규(朴宗奎) 연구위원은 “3월부터 경기가 하락하는 추세로 접어들 것”이라며 “내수와 소비, 기업의 설비투자 위축이 주된 요인”이라고 말했다.

가계소득이 줄면 은행과 카드사의 연체율이 높아지고 금융회사 건전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은행권의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은 아직 3% 미만에 머물고 있지만 카드사의 신용대출은 10%를 넘어서 이미 위험수위에 도달했다.

금융회사의 곳간이 흔들리면 어쩔 수 없이 기업 및 개인에 대한 대출을 줄일 수밖에 없다. 이러면 시중에 자금이 넘쳐나도 기업으로는 돈이 흘러가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대기업은 대내외 경제여건이 불안해 설비투자를 꺼리고, 정작 자금이 필요한 중소 벤처기업은 자금난에 시달려 기업부도율이 높아진다.

해외요인으로는 북한 핵 사태가 악화되면서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가는 현상이 걱정되는 부분이다. 외환보유액이 충분해 97년과 같은 달러부족 사태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환율이 급등(원화가치 하락)할 수 있다. 이는 은행 및 기업의 해외자금 조달이 막히고 해외부채 상환부담이 커진다는 뜻으로 전체적인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SK글로벌의 분식회계는 외국인투자자에게 한국에 대한 불신을 심어줬다. “한국의 3대 기업인 SK가 회계부정을 저질렀다면 나머지 기업은 어떻겠느냐”는 것이 이들의 반응이다. 증시 침체는 투자자의 심리적 불안감을 다른 금융권으로 확산시킨다.

박종규 연구위원은 “정부가 재정 및 금리정책을 조화시키는 중기적인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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