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업계 불신증폭

  • 입력 2000년 11월 16일 20시 17분


인터넷 솔루션업체 A사는 요즘 뒤숭숭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직원들의 퇴사 행렬이 줄을 잇기 때문이다.

한때 직원이 100여명에 달했던 이 회사는 지금 30명 가량으로 줄었다. 벤처위기가 본격화된 지난 두달 사이에는 20여명이 한꺼번에 퇴사했다. 투자자금이 내년 초쯤 바닥날 것이란 소문이 결정적이었다. 남은 직원들도 일손을 놓은 지 오래다. 연일 대책회의를 해보지만 뾰족한 안이 나올 리 없다. 요즘은 “조금만 더 참아보자”며 직원들을 달래던 팀장들이 먼저 사표를 내는 형국이다.

이 회사 김모사장(42)은 “요즘 출근이 두렵다. 매출 없는 회사에서 월급 받기 미안하다며 떠나는 직원들을 처음엔 순순히 보냈지만 요즘엔 배신감이 든다”고 말했다. 이동이 잦은 벤처기업의 특성상 확고한 직업윤리가 정착되지 않아 곤혹스럽다는 얘기다. 고용계약을 할 때 ‘퇴사 한달 전에 회사와 협의하고 퇴직 후 1년간 경쟁업체에 입사하지 않는다’는 각서까지 받지만 무용지물이다.

이처럼 벤처직원들의 대규모 이탈과 이직이 벤처문화의 몰락으로까지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다.

최근 직원들의 잇따른 퇴사로 마케팅 영업 등 일부 사업부문을 아예 포기한 B사의 문모사장(35)은 대부분 20대인 직원들에게 할말이 많다. “고생 안하고 커서 그런지 어려움을 참을 줄 모른다. 평생직장 개념이 없는 것은 이해하지만 걸핏하면 사표 쓰고 이 회사 저 회사 옮겨다닌다.”

문사장은 얼마전 회사가 어려워 몇달치 월급을 좀 깎겠다고 밝힌 일이 있다. 실제 15일 발표된 3·4분기 벤처기업의 순이익(460억원)이 전분기에 비해 64%나 감소, 일반기업(892억원, ―44%)보다 감소폭이 훨씬 컸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직원 몇명이 사내게시판에 그를 비방하는 글을 올려 경악했다고 한다. ‘사장이 경영을 잘못해서 회사가 어려워졌다’는 인신공격성 발언이었다. 문사장은 “그 뒤 일할 의욕을 완전히 잃었다“고 고백했다.

인터넷 솔루션업체를 운영하는 이모사장(45)은 벤처기업에서 일하는 다양한 출신들이 시너지효과보다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경우가 요즘 부쩍 늘었다고 말한다.

“대기업 출신들은 ‘회사 운영체계가 엉망이다. 빨리 손을 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재야에서 잔뼈가 굵은 엔지니어들은 ‘직원도 몇 안되는데 대기업 흉내 낼 필요 있느냐’고 맞선다. 그런가 하면 전문가를 자신하는 엔지니어들은 ‘내가 누군데 이 따위 일을 시키느냐’며 따지고 어린 실무자들은 ‘대기업 출신보다 내가 경력이 많은데 연봉이 왜 적으냐’며 대든다. 요즘은 전장의 한 가운데 선 느낌이다.”

그러나 이런 지적의 다른 편에는 벤처 직원들의 항변도 있다.

올들어 세 차례나 직장을 옮긴 뒤 최근 한 회사에 정착한 이모씨(24)는 “자금여유가 있을 때 어려운 상황에 대비하는 게 경영의 기본인데도 외형 늘리기에 급급하고 수익모델을 창출해 비전을 제시하기보다 주주들 돈으로 재테크에 열중하는 벤처기업인들이 많다”며 “회사의 위기는 우선 경영인의 능력부재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비즈하이 IR컨설팅의 한상복(韓相福·35)팀장은 “현 벤처위기의 본질은 수시로 변하는 외부환경보다 최고경영자(CEO)나 직원들의 열정 퇴색”이라며 “지금 이 시기야말로 벤처를 만들었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허문명기자>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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