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지사님은 서울 출타중"…예산 편성 '로비전쟁'

  • 입력 2000년 9월 7일 19시 00분


“예산 시즌엔 당적이 없다.”

한나라당 소속인 김진선강원지사의 얘기다. 자치단체장들은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온 신경을 정부, 그 중에서도 예산편성권을 쥐고 있는 기획예산처에 집중한다. ‘예산 따내기 전쟁’은 자치단체장들에게 이미 연례행사가 돼버렸다.

특히 한푼의 예산이라도 더 배정받기 위한 ‘상경(上京) 로비’가 치열하다. 서울 세종로, 과천, 대전 등에 있는 정부 각 부처 장관실이나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엔 거의 매일 시 도지사들이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한 손엔 오징어 고추장 등 지역특산물 꾸러미를 손에 들고 국회의원이나 장 차관부터 실무과장까지 가리지 않고 만난다.

▽닥치는 대로 만난다〓시 도지사들의 주요 로비대상은 물론 기획예산처 등 정부 각 부처와 여야 국회의원들이다. 안상영(安相英)부산시장은 일주일에 한번 꼴로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기획예산처를 빼놓지 않고 방문한다. 장 차관은 물론 실무국장 방에도 불쑥 들어가 지역 사정을 설명한다. 안시장은 언제 누구를 만날지 몰라 가방에 예산 관련 브리핑 자료를 항상 몇 부씩 갖고 다닌다.

김혁규(金爀珪)경남지사처럼 장관실을 ‘기습’하는 시 도지사도 많다. 경남도청의 한 관계자는 “사전에 관련부처 장관들과 면담 약속을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만큼 장관들을 만나설명하려면 그냥 기습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여권 소속 자치단체장은 그래도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허경만(許京萬)전남지사는 6일 오후 시 도지사 예산협의회가 끝난 뒤 전윤철(田允喆)기획예산처장관과 별도로 저녁식사를 할 기회를 얻어 427억원을 요구한 ‘전남생물산업육성사업비’가 전액 삭감된 것을 재검토해달라고 ‘읍소’했다는 후문이다.

▽당적도 필요없다〓여권 인맥이 부족한 영남지역 자치단체장들은 당적을 가려 만날 처지가 못된다. 안상영부산시장은 6월 원외위원장들뿐인 부산지역 여당인사들과 예산 관련 당정협의를 열었다. 안시장은 김기재(金杞載)의원, 노무현(盧武鉉)해양수산부장관, 김정길(金正吉)전 행정자치부장관 등 부산 출신 ‘여권실세’들과는 수시로 전화통화를 갖고 애로사항을 털어놓는 등 특별관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문희갑(文熹甲)대구시장과 이의근(李義根)경북지사는 대통령비서실장 출신인 민주당 김중권(金重權)최고위원의 역할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남에선 지역 출신 야당의원들도 시 도지사들의 등쌀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상황이다. 한나라당 윤영탁(尹榮卓·대구 수성을)의원은 “15대 때는 대구에 자민련 소속의 박준규(朴浚圭) 박철언(朴哲彦)의원 등이 있어 한나라당 의원들이 면피를 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전부 한나라당 소속이어서 책임감을 절감한다”고 토로했다.

인천시장, 대전시장, 충남북지사 등 자민련 소속 단체장들은 6일 당 총재인 이한동(李漢東)국무총리와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자민련이 공동여당이라고 하지만 예전처럼 당정협의가 복원이 안돼 지역사업 예산을 따내기 위해서는 직접 정부나 민주당을 상대로 로비를 펼쳐야 한다”는 푸념이 쏟아졌다고 한다.

▽문제점〓기획예산처 관계자는 “의원들이나 시 도지사들의 로비에 영향을 받아 예산을 짤 경우 예산이 꼭 필요한 곳이 아니라 왜곡돼 사용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부산시의 한 예산관계자는 “중앙정부도 예산 쓰임새가 뻔한데, 시 도지사들이 로비를 한다고 해서 큰 효과가 있을 수 있겠느냐”며 예산 로비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

<전승훈기자>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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