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신창이' 기금]'눈먼 돈' 멋대로 운용

  • 입력 2000년 8월 29일 19시 08분


기금 관리가 엉망일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훨씬 심각하다. 기금도 따지고 보면 국민의 재산인데 이렇게 엉망으로 운영해서야…

40년만에 처음으로 62개 기금의 평가를 주도한 기획예산처 관계자는 200조원에 가까운 자금이 방만하게 운영된 사실을 설명하면서 곤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29일 발표된 각종 기금에 대한 평가 결과는 짐작만 해온 기금의 부실운용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평가대상이 된 기금의 조성 규모는 작년말 기준 245조9000억원, 실제로 사업을 통해 굴린 돈의 규모는 197조원에 달한다. 사실상 정부가 관리하는 자금이기 때문에 예산에 준해 자금집행 내역을 따져야지만 각 부처의 뒷주머니 로 여겨온 관행에 밀려 편법이 묵인돼 왔다.

▽임자없는 눈먼 돈 〓각 부처는 기금을 설치할 때 어디에, 얼마나, 어떤 조건으로 쓸지에 대한 고민없이 돈 주머니 부터 만들고 보자는 식으로 나섰다. 따라서 준조세나 다름없는 막대한 자금을 조달해 쓰면서도 자금집행에 따른 효과나 우선순위를 따지는 사업의 타당성 검토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발전소주변지역지원사업기금은 취미교실이나 경로잔치를 주요 사업으로 삼았고 국민건강증진기금은 건강박람회 사업, 근로복지진흥기금은 관광실업대책사업에 돈을 쏟아부었다. 설립 목적에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수익성도 높지 않은 호텔업에 앞다퉈 뛰어든 것도 같은 맥락.

한 평가위원은 만약 자신의 돈이라면 그런 식으로 운용하지 못했을 것 이라고 개탄했다.

▽주먹구구 중복 지원〓기금 설립에 혈안이 되다보니 각 부처의 기금간 업무조정이 이뤄지지 않아 자금지원이 중복되는 사례가 잇달았다. 일부 사업은 예산사업과의 차별성도 의문시됐다.

국민건강증진기금이 벌이고 있는 자치단체보조사업은 예산으로 해야 하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려 재원확보가 어렵자 기금 형태로 추진하는 인상이 짙다는 분석. 고용보험기금 산재보험기금은 소관부처 운영경비의 일부를 기금에서 지출해 정부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라는 비판을 받았다.

▽기금관리 조직의 전문성 결여〓62개 기금 중 운용의 전문성을 인정받은 기금은 소수에 불과했다. 기금운용 계획과 집행결과를 평가하는 기금운용심의회는 형식적으로 운영됐고 소규모 기금은 아예 자산운용지침조차 갖추지 않았다.

고용보험기금과 우체국보험기금은 소관부처에서 직접 자산운용을 담당하기도 했다.

안정을 최우선시 해야 하는 정부 기금이 단기 위주로 돈을 굴리면서 특정 금융기관에만 예치한 것도 문제. 국제교류기금은 여유자금의 81%를 은행의 단기정기예금으로 운용했고 임금채권보장기금은 여유자금 2700억원을 증권사의 단기수익증권으로 굴렸다.

농안기금과 종자기금 등은 농협, 정보화촉진기금은 우체국,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은 100%를 주택은행에 예치했다.

서민들이 즐겨 사는 복권 발행을 통해 기금재원을 조달하는 것은 사행심을 조장할 뿐 아니라 소득 역진적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기금에서 발행하는 복권은 기술개발복권 복지복권 주택복권 체육복권 월드컵복권 중소기업복권 등 6종에 이른다.

▽칭찬받은 기금〓부실채권정리기금 고용보험기금 수출보험기금은 그나마 설치 목적을 달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술신용보증기금은 조사 보증 관련 전문인력(공학박사 36명)을 채용하고 외부전문가 풀(356명)을 확보해 전문성 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고 국민연금기금은 계약직 펀드매니저(22명)와 박사인력(18명) 등 전문인력을 채용해 지난해 24.5%(주식 137.3%)의 자체운용수익률을 기록했다. 공무원연금기금은 6개 연금매점 및 수안보호텔을 민간위탁해 448명의 인원을 감축했다.

▽해결책은 없나〓기금관리 체계의 가장 큰 맹점은 운용계획과 결산에 대해 해당부처 장관의 승인절차 외에는 견제장치가 거의 없다는 점. 42개 공공기금은 결산 내역을 국회에 보고하지만 20개 기타기금은 그럴 의무도 갖고 있지 않다.

소관 부처장의 승인만으로 막대한 자산의 운용이 가능하다보니 자의적 집행의 유혹이 생기고 효율성은 떨어진다. 기금의 필요성이 사라져도 돈줄 역할에 매력을 느낀 해당부처가 존속을 고집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실정이다.

정부는 존속 필요성을 전면 재검토해 예산사업으로 가능한 경우 폐지한다는 방침이지만 저항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기금이란? 채권발행 연금걷어 조성해 예산과 별도운용▼

정부가 예산과 별개로 특정한 목적을 위해 자금을 운용, 집행할 필요가 있을 때 채권을 발행하거나 연금 등을 거둬 조성하는 자금. 예산이 국민 세금과 세외수입을 주요 재원으로 삼는 반면 기금은 일종의 준조세를 통해 자금을 조달한다는 점이 다르다. 매년 국회에서 편성과 결산을 심의받는 예산과 별도로 운영된다.

기금 성격에 따라 기금운용 계획과 결산 내역을 국회에 보고해야 하는 공공기금과 소관부처장의 승인만 받으면 되는 기타기금으로 나뉜다. 작년말 현재 공공기금은 42개, 기타기금은 20개 등 모두 62개였으나 올해 4월 국채관리기금이 공공자금관리기금으로 흡수돼 현재는 61개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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