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왕자의 난'2R]두형제 泥田鬪狗 점입가경

  • 입력 2000년 3월 26일 23시 13분


“정몽구회장을 현대회장직에서 물러나게 한 24일의 인사는 정주영명예회장의 명에 의해 철회됐다.”(26일 오후 2시반 조선호텔에서 현대자동차 정순원기획조정실장)

“현대차 기획조정실이 외부 호텔에서 발표한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는 오늘 오후 5시 정몽헌회장이 직접 명예회장께 확인한 사실이다.”(26일 오후 5시55분 현대구조조정본부)

“구조조정본부가 발표한 내용은 물적인 증거가 전혀 없어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명예회장의 친필 서명을 부인하는 것인가.”(오후 7시반 현대자동차)

도대체 어느 쪽의 말이 진실인가. 24일의 인사를 굳히려는 정몽헌회장측과 뒤집으려는 정몽구회장측은 26일 치열한 공방을 펼쳤다. 한쪽이 “왕회장이 우리들 손을 들어줬다”고 주장하면 상대편에서는 즉시 이를 반박하는 치고받기가 연출됐다.

25일만 해도 현대 주변에서는 정몽헌회장이 굳히기에 들어간 분위기였다. 이날 오전 6시35분경 계동 사옥으로 출근한 정몽헌회장은 7시경 정명예회장에게 업무보고를 했다. 이 자리에는 이익치현대증권회장 김윤규현대건설사장 등 측근들이 자리를 함께 해 승전을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반면 평소 6시반이면 출근하던 몽구회장은 이날 하루종일 회사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 대조를 이뤘다.

12시 가회동에서 왕회장과 몽구 몽헌 3부자가 자리를 함께 했다. 그러나 세 사람은 말이 없이 묵묵히 밥만 먹었다. 두 형제는 전날밤 술을 많이 마신 탓인지 얼굴이 붉게 상기돼 있었다. 몽구회장은 특히 머리를 숙인 채 굳은 표정이었다.

이튿날인 26일 새벽 5시반 정몽헌회장이 가회동을 방문했다. 오전 10시반, 이번에는 몽구회장이 가회동을 찾았다. 11시경 집을 나선 몽구회장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오후 2시를 갓 넘은 시간에 각 언론사 기자들에게 현대자동차로부터 긴급 연락이 왔다.

그런데 기자회견장소는 현대그룹이 아닌 외부였다. 이날 오전부터 계동 현대사옥 출입은 완전히 봉쇄돼 있었다. 현대측은 “보안공사를 하게 돼 외부 출입을 막은 것 뿐”이라고 말했으나 사옥관리를 맡고 있는 몽헌회장측의 현대건설이 몽구회장측의 출입을 봉쇄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오후 2시반 조선호텔 연회장에서 기자들을 만난 현대차 정순원기회조정실장은 24일의 인사를 원천 부인하는 폭탄선언을 했다. 정명예회장의 사인이 담긴 인사명령문 사본까지 공개하는 정부사장의 얼굴에 득의의 표정이 엿보였다.

이번에는 몽헌회장측이 바삐 움직였다. 오후 4시20분경 가회동 정명예회장의 집을 몽헌 회장이 다시 찾아왔다. 4시27분부터 김윤규현대건설사장, 김재수구조조정본부장, 이익치현대증권회장 등이 뒤를 이었다. 1시간이 조금 넘게 정명예회장과 면담한 이들은 5시35분경 한꺼번에 집 밖으로 나온 직후인 5시45분 현대그룹의 출입통제가 해제되고 곧 구조조정본부의 공식입장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이 언론에 통보됐다. 10분 뒤 김재수구조조정본부장, 이영일PR사업본부부사장의 공동명의로 한 장의 발표문이 나왔다. 몇 시간 전 정순원부사장의 얘기를 다시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1시간여 만에 정몽구회장측(현대차)에 의해 다시 뒤집혀 상대방 끌어내기 싸움은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것임을 예고했다.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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