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 스탠더드]환경소송 봇물…공해기업 설땅없다

  • 입력 1999년 4월 29일 19시 28분


미국 앨라배마주의 두 방직회사는 수 십년 동안 방직염료를 호수로 몰래 내보내다 주민들에게 발각돼 소송을 당했다.

작년 11월 앨라배마주법원은 두 회사가 주민들에게 5천2백56만달러(약 6백30억원)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피해자들이 입은 실제 손해 15만5천2백달러의 3백38배에 이르는 돈이다.

배상금이 이렇게 껑충 뛴 이유는 징벌적 손해배상 때문이다.

89년 3월 엑손사 유조선이 알래스카 연안에서 좌초돼 1천1백만갤런의 원유가 유출됐다. 엑손 발데스호는 유조선 값으로 2천5백만달러, 원유값으로 3백40만달러를 잃어버렸다. 엑손사는 기름을 없애기 위해 91년까지 21억달러를 썼고 2001년까지 9억달러를 투입할 예정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91년 법원은 엑손사에 가혹한 판결을 내렸다.

오염지역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는 주민 1만4천여명에게 50억달러(약 6조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선원들이 항해 중 술을 마신 정황과 엑손사의 자산 규모를 감안한 금액이었다.

특히 이 소송이 ‘대표당사자 소송제’(Class Action)로 진행되는 바람에 엑손사의 벌금이 천문학적으로 불어났다. 대표당사자 소송제는 피해자 몇 명이 대표로 소송에서 이기면 똑같은 피해를 당한 다른 사람들도 별도의 소송없이 손해를 배상받는 재판 제도다.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오염 피해자가 실제로 입은 손해액을 받아내기도 힘들었다. 환경오염 사건은 인과(因果) 관계를 밝히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변호사 보건학자 의사 환경공학자 등을 동원한 기업과 맞서는 것은 처음부터 힘에 겨운 싸움이다.

이 때문에 피해 주민들은 대부분 민사소송으로 가지 않고 가해자가 주는 배상액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95년 전남 여천군에서 시프린스호가 침몰했을 때 주민 2만여명은 7백억∼1천억원의 손해를 봤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1백67억원만 받았다. 1인당 3백50만원 꼴.

당시 주민들은 국내 감정업체에 감정을 의뢰해 1년간 현장검증한 결과 악취로 인한 고통 등 계산할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고 가두리 양식장의 피해액만 7백여억원이라는 감정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호유해운과 유류오염 손해보상을 위한 국제기금이 별도로 지정한 외국감정업체는 피해액을 1백60여억원으로 산정했다. 결국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제시한 배상액만 받고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93년 이 지역에서 금동호가 침몰했을 때도 주민들은 9백31억원의 피해를 봤다고 주장했지만 보상액은 35억원에 그쳤다.

손광운(孫光雲)변호사는 “국내 환경오염 사건에선 대부분 소송 전 당사자끼리 합의로 배상액을 결정한다”면서 “이 때 실제로 확인된 손해액만 피해자에게 지급하므로 배상액이 적다”고 설명한다.

기업이 제시하는 배상액에 만족하지 못할 때는 민사소송을 내면 되지만 생계에 쫓기는 피해자들로서는 변호사 선임료와 인지대 등 소송 비용이 버겁기만하다.

미국에서는 환경을 오염시킨 기업이 설사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 사건도 있다.

최근 개봉된 로버트 레드퍼드 감독, 존 트래볼타 주연의 영화 ‘시빌 액션(Civil Action·민사소송)’은 환경 오염 기업의 말로가 어떤지 잘 보여준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70년대 미국 매사추세츠주 위번시에선 아이들이 잇따라 백혈병에 걸렸다. 환자 가족들은 그레이스와 비트리스라는 두 기업이 폐수를 방류해 지하수가 오염됐기 때문이라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9년을 끌다 패소하고 말았다.

그러나 미국환경청(EPA)은 재판결과를 무시하고 독자적인 조사를 벌였다. 마침내 두 기업은 6천9백40만달러가 소요되는 정화사업에 착수했고 그레이스는 공장을 폐쇄했다.

한국에서도 환경 오염 기업이 설 땅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환경단체 녹색연합은 다음달 10일 교수 변호사 등 40명으로 구성된 ‘환경소송센터’의 문을 연다. 이 센터는 환경을 위협하는 개발사업이나 기업과 싸우는 주민과 시민단체에 법률상담을 해주는 ‘주민지원단’과 민사소송을 통해 직접 문제를 푸는 ‘기획소송단’으로 구성된다.

녹색연합 김혜애(金惠愛) 대안사업국장은 “환경침해의 인과관계가 명확한 사건에 대해서는 즉각 소송을 벌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대규모 역학조사를 벌이겠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의학 보건학 환경공학 전문가들을 참여시킬 계획이다.

최병호(崔炳虎)변호사는 “현재는 공단의 어느 공장에서 흘린 폐수가 피해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명확히 밝히질 못해 그냥 넘어가는 수가 많다”면서 “전문가들이 힘을 합쳐 인과관계를 밝히기 시작하면 소송이 봇물처럼 터질 수 있고 배상금액도 크게 뛰어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현재 대구 경북과 부산 경남의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위천공단 문제도 ‘환경소송’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한다.

대구시에서 약속한 대로 ‘무공해 공장’을 주로 입주시키겠다면 우선 입주 기준을 엄격히 정해 공개해야 하고 이와 함께 수질 감시 시스템을 확실히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공단의 기업들이 낙동강물을 식수원으로 쓰는 부산시민들과 무더기로 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견해다.

법조계에선 환경소송과 제조물 배상소송의 피해자들을 위해 ‘대표당사자 소송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환경오염 피해자들의 소송절차가 간편해지고 배상액도 올라갈 수밖에 없다.

〈이성주기자〉stein3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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