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남아 있는 「실탄(외환보유고)」으로 일주일을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대외채무지불유예(모라토리움)사태가 남의 일이 아니다』
대선을 앞둔 한국 정치의 불확실성 때문에 외국정부와 금융기관들로부터의 차입이 사실상 중단돼 국가부도사태가 「발등의 불」로 떨어지자 청와대 당국자들은 12일 긴장한 표정으로 이렇게 탄식했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최근 들어 아예 경제문제 이외의 보고는 받지 않고 있다는 게 측근들의 얘기다. 한 핵심관계자는 『김대통령은 불을 끄기 위해 사력(死力)을 다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대통령이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 주요 3당 대선후보와의 청와대 회동을 전격추진하고 나선 것도 이처럼 절박한 상황인식 때문이다.
특히 최근 대선후보간에 「국제통화기금(IMF)과의 재협상」 문제가 치열한 공방이슈로 대두한 것도 청와대 회동 주선의 요인으로 작용한 듯하다. 이 논쟁이 IMF는 물론 외국 정부와 금융기관들의 「대선 이후」에 대한 불신감을 가중함으로써 외환위기가 더 악화했다는 게 청와대측 인식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거국적인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모습을 대외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외국의 신뢰감을 되찾는 것이 악순환의 고리를 풀기 위한 선결과제』라며 『13일 회동이 우리에 대한 외국의 불신감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측은 11일 각당과의 사전협의과정에서도 「한국의 정치적인 불확실성이 외국으로부터의 자금차입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는 후문이다.
실제로 국민회의가 이날 「재협상」이라는 표현을 「추가협상」으로 바꾸었고 한나라당측은 12일 「국민회의 책임론」을 들어 참석에 유보적 입장을 보이다가 회동에 응하기로 입장을 바꿨다. 일단은 국가부도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긴박한 상황속에서 열리는 13일 청와대 회동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대목은 김대통령과 대통령당선자간의 관계설정을 둘러싼 논의가 얼마큼 가시적으로 진전되느냐 하는 점이다. 청와대는 이번 대선에서 누가 당선하든 현 정부와 내년 2월에 출범할 새 정부간에 경제문제에 관한 불협화음이 야기돼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 대통령당선자측에 조각권까지 부여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합리적인 인사나 정책건의는 대폭 수용할 수 있다는 선으로 입장을 정리해 놓았다.
청와대측이 16일로 임기가 끝나는 이시윤(李時潤)감사원장의 후임인선을 미루고 최근 사의를 표명한 이경식(李經植)한은총재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청와대측은 또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씨 등 두 전직대통령의 사면문제도 대통령당선자측과의 협의아래 단행할 방침이다.
〈이동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