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씻고 자연을 듣다…명상 속에 고요한 울림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4월 13일 14시 29분


‘동판화 개척’ 김상유 탄생 100주년 기획전 ‘쉽게 닳지 않는 사람’

김상유의 ‘세이낙자연성(洗耳樂自然聲)’.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김상유의 ‘세이낙자연성(洗耳樂自然聲)’.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졸졸 흐르는 개울물에 작은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친다. 그 앞에 한 남자가 질박한 그릇과 함께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넓고 맑은 여백 속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연 표정은 마치 달관한 듯 보인다. 귀를 씻고 자연의 소리를 즐긴다는 뜻의 ‘세이낙자연성(洗耳樂自然聲)’이다.

김상유 작가(1926~2002)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마련된 기획전 ‘쉽게 닳지 않는 사람’이 서울 종로구 서울미술관에서 1일 개막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동판화(etching)를 시도하며 현대 판화를 개척했다고 평가받지만, 그간 대중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김상유를 대대적으로 조명한 전시다. 그림 ‘세이낙자연성’을 포함한 작품 150여 점을 연대별로 나눠 소개한다.

김상유의 동판화 ‘From his records’(1969년). 서울미술관 제공
김상유의 동판화 ‘From his records’(1969년). 서울미술관 제공

전시는 동판(銅板)에 죽음을 표현한 초기작부터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이 2022년 매입해 유명해진 ‘대산루’ 등 후기작까지 아우른다. 화가를 꿈꾸는 영어 교사였던 김상유는 불혹을 훌쩍 넘긴 1970년에야 작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제1회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 받은 대상이 계기였다. 그러나 그 이후 외부 활동보다는 내면에 더욱 몰두하면서 한국적 정서와 미감을 다루는 데 매진했다고 한다.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이 2022년 매입해 잘 알려진 김상유의 유화 그림 ‘대산루’. 서울미술관 제공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이 2022년 매입해 잘 알려진 김상유의 유화 그림 ‘대산루’. 서울미술관 제공
1990년대 제작된 유화 작품들은 그 고민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유화 물감을 칠한 뒤 천으로 닦아내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 옅고 투명하게 채색돼 있다. 김현주 전시기획팀장은 “오랜 시간을 들여 마치 수행하듯 작업했기에 작품 하나에 3, 4개월씩 걸렸다”며 “단순하고 절제된 화면과 홀로 선 구도자의 모습은 삶과 자연에 대한 작가의 통찰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화폭은 말년에 이르러 더 여유롭고 단출해진다. 하얀 바탕에 기하적인 자연과 명상하는 사람이 스미듯 배치된 ‘청산록수’가 대표적이다.

김상유의 말년작 ‘청산록수’. 서울미술관 제공
김상유의 말년작 ‘청산록수’. 서울미술관 제공
후기작 ‘다일완’에 소박한 필체로 적힌 글귀 무애착정(無碍着淨)이 뜻하는 바처럼, 김상유의 그림은 관람객의 마음속 소란마저 잠재운다. 생전 작가에게 꼬리표처럼 달라붙던 ‘고독’이나 ‘은둔’ 같은 수식어 대신 사근사근한 고요가 가까이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는 작품마다 거의 빠짐없이 그려 넣은 명상하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나 자신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8월 17일까지.
#서울미술관#동판화#세이낙자연성#현대판화#유화#명상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트렌드뉴스

트렌드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