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의 ‘신발끈 없는 운동화’… 뇌성마비 청년의 요청으로 제작
일본 이시카와현립도서관에선 장애인 단체와 협력해 공간 조성
◇모두를 위한 디자인은/김병수 지음/296쪽·2만 원·휴머니스트
신발 브랜드 나이키가 신발을 보다 편리하게 신고 벗을 수 있도록 디자인한 ‘플라이이즈’ 라인의 제품. 뇌성마비 청년의 편지에서 시작된 이 제품으로 노인, 임산부 등이 편리함을 누리고 있다. 셔터스톡
1995년 조산으로 예정일보다 두 달 일찍 태어난 매슈 왈저는 한 살 때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다. 오른손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던 그는 신발끈을 묶는 일이 늘 큰 도전이었다. 2012년 여름, 왈저는 나이키에 “신체 능력과 관계없이 누구나 신을 수 있는 신발을 만들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의 편지는 소셜미디어에 널리 확산되며 나이키에도 전해졌다. 결국 나이키는 신발끈 대신 지퍼와 벨크로 스트랩을 적용해 손을 쓰지 않아도 쉽게 신고 벗을 수 있는 ‘플라이이즈(FlyEase)’ 라인을 개발했다. 뇌성마비 청년의 요청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임산부와 노인 등 더 많은 이들이 이 제품의 편리함을 누리고 있다. 배제된 사용자를 중심에 둔 디자인이 오히려 더 넓은 세대와 상황을 포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책은 장애인과 어린이, 노인 등 다양한 감각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활용해 디자인의 ‘기준점’을 다시 묻는다. 삼성전자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뒤 영국 런던에서 사회적 기업가정신을 공부한 저자는 5년 동안 일본, 미국, 네덜란드, 핀란드 등 9개국을 돌며 300명 이상의 전문가와 당사자를 인터뷰했다. 발달장애가 있는 어린이, 휠체어 이용자, 시각장애인의 부모 등 디자인 과정에서 중심에 놓이지 못했던 사용자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책은 시각을 조금만 바꾸면 모두를 위한 디자인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발로 뛴 인터뷰로 전달한다. 저자는 40여 년간 류머티즘을 앓아온 전상실 씨와의 대화를 통해 아파트가 앉아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고 설계됐다는 점을 지적한다. 전 씨는 정수기 물을 마시기 위해 막대기를 사용하고, 손이 닿지 않는 냉장고 위 칸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저자는 “최대한 많은 사람이 편리하게 쓰도록 고안된 디자인이라도, 그 장벽을 마주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시각의 확장은 예술로도 이어진다. 영국 아티스트 수 오스틴은 개조한 휠체어를 타고 바닷속을 유영하는 영상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휠체어와 함께 바다를 헤엄치는 그의 모습은, 고정관념을 깨는 행위 자체가 예술가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음을 증명한다.
중요한 건 사용자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는 디자인이다. 일본 이시카와현립도서관은 현 내 장애인 단체들과 협력해 디자인을 완성했다. 열람 공간의 경사로 기울기와 너비, 휠체어 회전 가능 여부는 물론이고 서가에서 책을 쉽게 집을 수 있는지, 도서 반납함 투입구 높이가 적절한지까지 실제 사용자 테스트를 거쳐 세심하게 결정했다. 도서관 경영관리과의 사카이 씨는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답은 오직 현장에서 찾는다”고 말했다. 일률적인 배리어프리 가이드라인 대신, 실제 사용자들의 의견을 듣고 최대한 반영해야 한단 뜻이다.
이 밖에도 장애인이 ‘잘 버틴 하루’가 아닌 ‘최상의 하루’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한 미국 글레이저어린이박물관, 단순히 시설에 수용되는 게 아니라 주민으로서 일상을 살아가게 만든 네덜란드 호그벡 마을 등 더 많은 사람을 포용하기 위해 노력한 다양한 디자인 사례가 담겨 있다. 디자인은 거창한 기술이 아니라 사소한 관점의 차이임을 깨닫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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