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모궁(景慕宮)이 헐려 간다!
창경원(昌慶苑) 건너편 총독부의원 동팔호실(東八號室. 편집자 주: 일본이 세운 정신병원) 이웃에서 안타까운 정신병자들의 아우성을 귀가 아프게 들어가던 경모궁 옛집은 무심한 모군(募軍. 편집자 주: 공사판 따위에서 삯을 받고 품을 파는 사람)들의 곡괭이 끝에 무참하게도 헐어 간다. 장엄한 궁성을 등지고 아담한 낙산(洛山)을 향하여 외롭게 서 있던 이 집은, 리조(李朝) 영조대왕(英祖大王)의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절륜한 힘과 위대한 포부를 가지고 큰뜻을 펴려고 하다가 낙형을 당하여 지하의 혼이 된 천추의 원한을 위하여, 그의 아들인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지어놓고 춘추로 제향하던 곳이다.
세월이 흐르자 시국조차 바뀌어, 춘추 두 번의 향촉은 이미 끊어진 지가 오래였거니와, 이제 말없이 헐려 가는 옛집을 위하여 울어주는 자는 창덕궁(昌德宮) 비원으로 돌아드는 ‘두루미’ 떼라 하는지?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일반 동물의 타고난 팔자요, 전변환멸(轉變換滅)이 또한 세상 만물의 피치 못할 운명이라서, 있던 것이 없어지고 없던 것이 생겨난다고 우리가 따라 다니면서 슬퍼하고 기뻐할 까닭이야 무엇이겠습니까마는 여러 백년 궁(宮) 앞을 지키던 “해태”가 덜미를 잡히어 쫓기어 간지가 이미 오래였고 수십 년래 애국충신의 장엄한 혼백(魂魄)을 모시던 장충단(奬忠壇)이 색다른 발굽에 밟힌 지 또한 오래였으며 무심한 로동자의 곡갱이에서 서대문(西大門)과 경모궁(景慕宮)이 헐린 뒤를 이어 독립문마저 허물어 버린다는 소식은 흰 옷 입은 사람의 가슴에 얼마나 쓰라리게 울리었겠습니까.
나는 오래전부터 이 역사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이 비극은 사람의 피눈물 없이는 읽어내릴 수 없다. 이 얼마나 참담한 역사인가.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 같은 사람은 이 상황에서 최소한의 상소라도 올렸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위를 잃을까 두려워 팔짱만 낀 채 방관했다.
그리하여 세자는 이 땅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고, 그의 아들인 어린 정조는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뼛속 깊이 사무치게 되었다.
후일, 영조 역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긴 했지만, 한 번 떠난 생명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눈물만이 쓸쓸히 무릎 위로 떨어질 뿐이었다. 그는 정조를 안고 후원에 거닐며, 세자의 넋을 향해 은근히 사죄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1777년(정조 원년), 정조는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임금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으로서의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을 풀 길이 없었다.
그 뒤에 경모궁을 지은 것도, 정조가 아버지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며, 월근문(月覲門)을 세운 것도 또한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 양주에 있던 아버지의 능을 수원으로 옮긴 것도, 모두 아버지를 향한 그의 깊은 사랑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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