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 스릴러 장르가 최근 인기다. 왼쪽 사진부터 최정원의 소설 ‘허밍’, 미국 영화 ‘하우 투 블로 업 어 파이프라인’, 윤고은의 소설 ‘밤의 여행자들’. 각 출판사·제작사 제공
어느 날 대재앙의 검은 비가 내린 서울. 사람들의 피부가 쩍쩍 갈라지고 나뭇가지 같은 각질이 솟기 시작한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번지며 서울 시민 수백만 명이 나무로 변해버린다.
서울 전역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 “90분 안에 서울을 탈출하라!”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를 뚫고 폭발하듯 솟아오른 나뭇가지들이 건물 표면에 살풍경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잎사귀를 뜯으면 나무에선 피를 닮은 새빨간 수액이 튀어 오른다. 결국 저주받은 도시엔 방벽이 들어서고, 서울은 거대한 테라리엄(terrarium)으로 변해간다.
최정원의 신간 소설 ‘허밍’(창비)은 서울 시민들이 ‘나무 좀비’가 된다는 파격적인 설정을 담고 있다. 요즘 이런 장르를 ‘에코 스릴러’라고 부른다. 환경(ecology)과 스릴러(thriller)의 합성어로, 자연재해나 기후 위기 등을 소재로 긴장감이 넘치는 콘텐츠들을 일컫는다. 영미권에서 시작돼 최근 국내에서도 여러 소설이나 영화가 나오는 분위기다. 환경 문제란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자연의 반격’이 낯설면서 신선하다는 평가가 많다. ● “자연은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에코 스릴러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시도가 어떻게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드러내는 작품이 많다. 최근 미국 SF문학상인 필립 K 딕상 후보에 오른 정보라의 소설집 ‘너의 유토피아’(래빗홀)에 실린 단편 ‘씨앗’이 대표적이다.
이 소설엔 인간을 향해 씨앗을 퍼뜨리는, 능동적인 식물들이 등장한다. 인간이 씨 없는 수박처럼 불구의 식물을 만들며 과학기술의 승리를 자축할 때, 식물은 인간의 모든 구멍이란 구멍에 씨앗을 안착시키는 방식으로 반격을 가한다. 인간에게 씨앗을 퍼붓고 조용히 개체 수를 늘리며 번성하는 식물들을 통해 ‘자연은 수동적 존재’라는 통념을 깬다.
에코 스릴러는 액션과 미스터리 등 장르적 요소를 적극 활용한다. 천선란의 소설 ‘나인’(창비)에선 평범한 고등학생에게 식물과 대화하는 능력이 생긴다. 주인공은 식물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2년 전 학교 선배 실종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다. 이후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은 추리 스릴러의 문법을 따랐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환경 재난 서사의 고전이라면 ‘어느 날 새들의 울음소리가 사라졌다’고 시작하는 레이철 카슨의 논픽션 ‘침묵의 봄’(1962년)을 꼽을 수 있다”며 “관점과 장르가 다양해지면서 요즘엔 ‘스릴러’를 가미한 픽션이 인기를 얻고 있다”고 설명했다.
독일 드라마 ‘더 스웜’(왼쪽), 미국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 각 출판사·제작사 제공해외에선 최근 영상 콘텐츠로 에코 스릴러가 더 주목받는 추세다. 지난해 에미상 8개 부문을 수상한 미국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숙주를 좀비로 변이시키는 대규모 곰팡이 감염을 소재로 했다. 동명의 비디오게임이 원작으로 2023년 HBO에서 처음 방영됐으며, 올 4월 두 번째 시즌이 나온다.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독일 드라마 ‘더 스웜’은 무분별한 해양 환경 파괴로 생존을 위협당한 해양 생물이 인간에게 반격을 가하는 이야기를 다뤘다.
에코 스릴러의 유행은 팬데믹을 거치며 ‘세계가 함께 앓는다’는 감각이 보편화된 것이 주요 원인으로 풀이된다. 세계적인 질병의 유행이나 집단적인 격리 같은 작중 묘사가 더 이상 허황되게 느껴지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최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기후 위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 관련 콘텐츠가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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