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1947년 부산, 역사의 변두리에도 삶은 있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7월 29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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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 어느 하루 생생하게 재현
난장 속 살아낸 보통 사람들의 인생
◇잃어버린 사람/김숨 지음/664쪽·2만 원·모요사

200자 원고지 1880장 분량의 긴 소설이지만 이야기는 단 하루를 그렸다.

1947년 9월 16일 부산. 해외에서 많은 동포들이 몰려온다. 중국에서, 만주에서, 일본에서, 조선이 해방됐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하지만 기쁨보다는 슬픔이 크다. 귀환한 이들은 제 몸 하나 건사하기 바쁘다. 생계 유지에 급급했기에 토박이로부터 ‘골치 썩이는 존재’들로 취급받는다.

이야기는 미도리마치라는 사창가로 친구를 만나러 가는 애신의 발걸음을 따라 진행된다. 큰 사건이나 뚜렷한 주인공은 없다. 그 대신 강제 징용으로 타지에 끌려갔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온 이들,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화상을 입어 얼굴이 문드러진 사람,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돌아왔으나 다시 사창가로 내몰렸던 사람들, 조선인 남편을 따라 조선에 왔으나 버림받고 오도 가도 못하는 일본 여자들을 조명한다. 애신이 마주치는 여러 공간과 인물들이 품은 슬픔에 주목한다.

논픽션으로 느껴질 정도로 그 시절을 생생하게 재현하면서 저자는 식민 지배와 전쟁으로 삶을 빼앗긴 이들, 역사의 변두리를 배회하는 이들이 말을 할 수 있게 공간을 내어준다. 이들의 삶을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사회의 혼란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사람들이 곧 우리의 역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상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받은 저자는 ‘한 명’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등 여러 작품에서 시대의 아픔에 집중해왔다. 자신의 11번째 장편소설인 이 작품에선 광복 직후의 난장 속에서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 역사의 부침을 어떻게 견뎠는지를 그려낸다.

박혜진 문학평론가는 “애끓던 그 시절은 늑골이 주저앉는 이별이 이다지도 흔했다”고 말한다. 작품 속 스쳐 지나가는 두 인물의 대화는 1947년 9월 16일 또한 그 흔한 시절 중 하루라고, 그렇지만 기억해야 하는 날이라고 강조한다.

“얘야, 오늘을 기억해라. 오늘을 잊지 말고 기억해라.”

“오늘이 중요한 날이에요?”

“아니…. 그저 깃털처럼 무수한 날들 중 하루일 뿐이란다. 얘야, 그렇더라도 오늘을 꼭 기억하렴.”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광복 직후#부산#역사#강제 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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