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먹지를 못하니”… 운수 좋은 날 아내는 왜 설렁탕을 사달라고 했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21일 13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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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식민지의 식탁’
근대 소설로 보는 식민시대 음식

책 ‘식민지의 식탁’ 표지
책 ‘식민지의 식탁’ 표지


“설렁탕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현진건이 쓴 소설 ‘운수 좋은 날’(1924년)의 안타까운 결말은 오래도록 한국인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대목. 주인공 김 첨지는 퇴근길에 부인이 원하던 설렁탕을 사왔지만 부인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그런데 부인은 왜 하필 ‘설렁탕’을 사달라고 한 걸까. 배탈이 난 환자가 먹기엔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텐데.

소설 배경인 1920년대에 설렁탕은 대표적인 외식 메뉴였다. 당시 신문기사들을 보면 1920년까지 경성 안팎에 설렁탕 가게는 25개뿐이었으나 1924년엔 100군데가 넘는다. 당시 설렁탕은 한 그릇에 13~15전. 요즘 시세로 치면 3900~4500원으로, 서민도 크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소머리고기로 육수를 내 몸보신에 좋다는 인식도 강했다. 어쩌면 심성 고운 부인은 남편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설렁탕을 고른 게 아닐까.

국문학 전공자로 성균관대 학부대학 대우교수인 저자는 신간 ‘식민지의 식탁’에서 근대소설 10편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유행했던 음식과 그를 둘러싼 문화를 다뤘다. 선정 작품은 염상섭의 ‘만세전(1924년)과 이상의 ‘날개’(1936년), 심훈의 ‘상록수’(1936년) 등 우리에게 친숙한 소설들이다. 저자는 “먹는다는 행위는 사회 문화적 취향과 연결되며 제도에 지배되기도 한다”며 “안타까운 것은 한국에서 그 시기가 식민지라는 역사와 맞물려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광수의 ‘무정’(1917년)에선 좀더 이채로운 음식이 등장한다. 주인공 영채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로 맘먹고 탄 평양행 기차에서 일본 도쿄 유학생인 병욱을 만난다. 병욱은 상처가 깊던 영채에게 위로를 건네며 어떤 음식을 건넨다. 영채는 “구멍이 숭숭한 떡 두 조각 사이에 엷은 날고기가 끼인 것”을 맛본 뒤 “특별한 맛은 없으면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운치 있는 맛이 있다”고 느낀다.

이 음식은 바로 샌드위치였다. 일본회사 ‘오후나켄’이 1898년부터 일본 기차역에서 팔며 ‘서구 음식’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이후 조선에도 들어왔다고 한다. ‘무정’에는 또 다른 음식도 등장한다. 영채와 정혼한 형식은 하숙집에서 끓인 된장찌개를 “지극히 졸렬한 음식”이라고 비난한다.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이 한국 전통 문화와 서구 문명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당시 경성에서 크게 유행했던 ‘카페’의 분위기도 맛볼 수 있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년)에는 구보 씨가 즐겨 찾은 ‘낙랑파라’라는 카페가 나온다. 당대 문인들은 카페에 모여 피로하고 우울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여기선 커피도 팔았다. 채만식은 1939년 잡지 ‘조광’에 기고한 글에서 커피를 “힝기레 밍기레한 게 맹물 쇰직한 맛”이라고 표현했다.

저자는 문학과 역사를 무게감 있게 다뤘지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추억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상의 ‘날개’에 등장하는 두부장수나 심훈의 ‘상록수’에 나오는 카레를 마주하다보면, 그 시대를 살진 않았는데도 왠지 ‘찡한’ 옛 앨범을 들추는 기분이랄까. 오늘 저녁엔 학창 시절 읽었던 그 소설들을 다시금 들춰보고 싶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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