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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두드리고 붙이고 잇고 다리고…한지의 맛 살아났다 [영감 한 스푼]

입력 2022-01-29 14:00업데이트 2022-01-29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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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리고 물 뿌리고 덧대고… 찢겨질 줄만 알았던 한지
먹을 피어오르게 해 동양화에 새로운 맛과 멋을 안기다
강미선, 관심(觀心)- 연(蓮) 3, 2021년. 금호미술관 제공

안녕하세요. 김태언 기자입니다. 이번에 새로 영감 한 스푼 뉴스레터 제작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현재 동아일보 문화부에서 미술 영역을 취재하고 있는데요. 앞으로 김민 기자와 함께 미술에서 엿보는 인사이트 소식을 현장의 생생함을 담아 전달 드리려 합니다. (저는 한 달에 한 번 가량 소식을 전달 드릴 예정이에요!)

저를 비롯한 미술 담당 기자들은 하루 한 곳 이상의 전시회를 취재하곤 하는데요. 유명 화가의 그림부터 화려한 색감의 캔버스, 압도적인 크기의 조형물까지 휘황찬란한 작품들을 보면서 인사이트를 얻을 때도 많지만 그 난해함에 심적으로, 물리적으로 지칠 때도 많습니다. 이런 현란함에서 조금은 벗어나 관람객들에게 힐링을 주는 전시가 있었는데요. 동양화 작가 강미선(강미선 초대전)의 작품들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강미선은 동양화의 기본 재료인 한지와 먹의 활용법에 대해 누구보다도 치열한 고민의 흔적과 탐구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는 현대 사회 속에서 소박하고 단순한 가치를 추구하려는 강미선의 생각을 전시장에서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영감 한 스푼 미리 보기: 한지에 대한 애정, 수묵화 외길을 지키다
강미선 초대전: 水墨, 쓰고 그리다

1. 강미선은 한지와 먹에 ‘물감’을 더하는 서구적 방식의 ‘동양화 멋내기’를 과감히 벗어 던진다.

2. 나의 것, 나만의 길은 사물에 대한 순도 높은 애정과 열정에서 비롯된다. 한지에 대한 골몰은 기성 동양화의 흐름과는 다른 결의 배접 기법‘ 만들어내게 했다.

3. ’겹겹이 쌓은 한지‘라는 새로운 형태의 도화지 위에서 먹은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다채로운 색으로 피어오른다.

○ 동양화의 진짜 멋을 찾아 나서다
1980년대 국내 동양화단에는 수묵화, 수묵담채화, 채묵화 등 여러 화풍이 혼재돼 있었습니다. 수묵화가 한지와 먹으로만 그린 그림이라면, 수묵담채화는 수묵화에 약간의 물감을 섞은 그림이고, 채묵화는 여기에 물감의 비중이 높인 그림을 말합니다.

당시 홍익대 출신의 동양화가들은 전통 재료만을 사용하는 수묵화를 통해 한국 그림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습니다. 남천 송수남(1938~2013)을 중심으로 동양화가들은 지속적으로 수묵화 단체전을 벌였고, 이런 움직임은 수묵화운동이라 이름 붙여졌죠.

강미선, 한옥(韓屋) 5, 2021년. 금호미술관 제공

하지만 수묵화운동의 열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동양화는 서양화의 영향을 받으며 점점 더 그 화려함을 더해갔습니다. 한지만 썼을 뿐 다채로운 색감의 유화가 더해졌고, 여백의 미보다는 빽빽함이 채워졌죠. 반대로 캔버스에 먹을 사용하면서 서양화인지 동양화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지기도 했습니다.

동서양의 컬래버레이션, 동양화의 진화라 평가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동양화의 본질이 훼손되어 간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강미선의 생각은 후자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다른 길로 빠지면 다시는 내가 좋아하는 수묵으로 되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남천의 제자이자 홍익대 동양학과를 나온 강미선은 그간 동양화의 변화, 동양화가들의 변심을 지켜보면서 다시금 동양화의 기본인 한지와 먹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먹색과 한지의 색이 저에겐 제일 편안한 색이었기 때문이라면서요.

작가는 먹빛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한지 배접(종이를 여러 겹 포개 붙임)에서 찾습니다. 한지를 여러 겹으로 쌓아 올린 뒤 표면을 방망이로 두드리고, 잘 붙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다리미로 다림질을 하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해 만든 것이죠. 이 같은 바탕지를 만드는 일은 작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라고 하네요. 그림 그 자체만큼이나 바탕을 더 자세히 들여다 봐야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강미선, 관심(觀心)- 세심(洗心), 2021년. 금호미술관 제공

전시장에서 본 작품 관심(觀心)-세심(洗心)은 한 번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돌과 같은 우둘투둘한 질감이 선명했는데요. 이처럼 갱지 같은 질감에 더해지는 붓칠은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입니다.

종이를 겹쳐 붙이고 두드리면 찢어질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 반대로 단단해집니다. 거기에 담묵을 올리면 종이는 그것을 다 받아내죠.

작가의 배접 공정을 보니 마치 굴곡 있는 삶을 살아온 주인공이 현실을 마주하고, 버텨내며 더 단단해지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느껴졌는데요. 이와 관해서는 작가와 더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 한지 위에서 피어오른 수묵
기자 : 어떤 계기로 배접 기법을 만드셨나요?

강미선 : 1990년대 중반이었어요. 석사 졸업 후인 1990년대 초에 3~4년간의 공백기가 있어요. 개인적으로 나만의 것을 고민하던 시기였죠. 스승이었던 남천 송수남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먹으로 그림 그리는 사람은 많으니 네 길을 찾으라고요.

기자 : 어떻게 그 길을 찾으신 건가요?

강미선 : 한참을 고민하다 제가 한지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문득 자각했어요. 종이 만드는 걸 따라다닐 정도로 애정이 넘쳤죠. 곧장 한지로 이것저것 실험을 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배접을 발견했고, 전시 작품에서 보실 수 있는 작품의 질감을 만나게 된 거예요. 그런데 질감만 좋은 게 아니라 먹을 입혔더니 먹색이 다양하게 피어오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죠.

기자 : 피어오른다는 표현이 재밌습니다.

강미선 : 수묵화는 먹이 종이 뒷면까지 스며들었다가 다시 피어오르면서 색이 나와요. 종이 한 장에서 먹이 우러나오는 것과 두세 장이 붙은 종이에서 우러나오는 맛이 달라요. 생각지 못했던 색이 나오기도 하죠.

기자 : 배접이 새로운 기술이기는 하나 이게 내 길이다 확신하는 건 또 다른 문제 같습니다.

강미선 : 자신감을 준 또 다른 사람이 있었죠. 1994년, 지금은 없어진 서울 단성갤러리에서 이런 질감의 작품을 전시했었어요. 그런데 전시 기간 중에 어떤 일본인이 길을 물으러 들어왔기에 가르쳐줬어요. 나가면서 그 사람이 작품이 정말 좋다. 나중에 전시 열게 되면 연락 달라면서 명함을 줬어요. 저는 그 다음 전시를 열 때 도록을 일본 주소로 부쳤고요.

기자 : 다시 연락이 왔나요?

강미선 : 네. 전시를 보러 오기도 했고 일본으로 초대까지 하더라고요. 작품 20여 점을 들고 일본 후쿠오카로 오라고요. 반신반의하면서 갔는데… 정말 놀랐어요. 알고 봤더니 큰 갤러리를 운영하는 대표더라고요. 1996년 쿠라야 갤러리에서 전시한 작품은 완판됐어요. 정말 감사했고, 큰 힘이 됐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선 한참을 마음이 아파 일본에 가질 못하기도 했어요.
○ 집중할 대상이 있다는 것
지난해 4월, 금호미술관으로부터 전시를 열자고 제안 받은 강미선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막막했다고 합니다. 전시 규모가 미술관 전관(7개 전시실)을 사용하는 방대한 규모였기 때문이죠. 한 개 전시 공간을 채우는 것도 힘든 일인데 일곱 개라니요. 하지만 그는 약 반 년 간 신작 35점을 만들어냅니다.

강미선, 금강경(金剛經)-지혜의 숲 부분, 2021년. 금호미술관 제공

그 중에서도 22m 크기의 수묵 설치 ’금강경(金剛經)-지혜의 숲‘은 한자의 다양한 색감과 먹빛의 매력을 웅장한 풍경처럼 보여줬습니다. 작가는 금강경을 만들기 위해 10여년 간 모아온 수천, 수만 장의 종이들을 모두 꺼내 들었고, 가로세로 11cm의 한지 조각을 한 땀 한 땀 채워 넣었습니다. 그렇게 작성한 글자만 무려 5149자. 4개월에 걸친 작업이었다고 합니다.

강미선, 무언가(無言歌) 부분, 2021년. 금호미술관 제공

미술관 지하 1층에 있는 무언가(無言歌)에서는 작가의 또 다른 시도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감물로 불상을 그린 한지 조각들로 벽을 채워 넣은 작품인데요. 마치 어느 석회 동굴에 들어와있는 느낌을 줍니다. 작가는 자연의 재료인 감을 활용해 이 색을 냈다고 하는데요. 지난 여름, 작업실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서 떨어진 초록색 땡감을 활용했다고 합니다. 땡감은 그 속에 갈색 빛을 담고 있었는데요. 감물로 담묵(옅은 먹빛)과 농묵(진한 먹빛) 같은 불상의 농담을 표현했습니다.

강미선의 작품들을 통해 동양화 작가들의 치열한 고민과 시도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자신이 동양화를 시작한 이유에 집중한 작가에게서 어떤 단단함도 느낄 수 있었고요. 독자분들도 전시회에서 동양화의 매력을 맛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김태언 드림.
전시 정보

강미선 초대전: 水墨, 쓰고 그리다
2021.11.19~2022.2.6
금호미술관(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18)
작품수 3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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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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