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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그날 밤, 쇠퇴한 도시의 빈집이 타올랐다[책의 향기]

입력 2021-12-11 03:00업데이트 2021-12-1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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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파이어/모니카 헤시 지음·박동복 옮김/371쪽·1만7500원·돌베개

이상한 밤이었다. 2012년 11월 12일 미국 버지니아주의 소도시 애커맥 카운티. 주택가 빈집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2층 높이에서 시작된 화염은 이내 마당까지 번졌다. 하룻밤에 불이 여러 건 나는 일이 몹시 드문 작은 도시였지만, 애커맥의 소방대원들은 이날 밤 두 차례 더 출동했다. 그 후 5개월 동안 이들은 총 86번의 출동 명령을 받는다.

책은 이 연쇄 방화를 예사롭지 않게 여긴 워싱턴포스트(WP) 기자의 심층 취재기다. 저자는 몇 달씩 애커맥에 머무르며 주민과 수사관, 의용소방대원들을 인터뷰했다. 이런 사건들은 흥미진진한 소설의 모티프가 되거나 범죄 수사물로 재구성되기 마련이지만 저자는 이 같은 방식을 쓰지 않았다. 그저 그가 총 2년간 수집한 경찰 조사 결과와 재판 기록, 방화에 대한 전문가의 정신분석학적 견해 등을 건조한 어조로 나열했다. 그러나 이 자료들이 정밀하게 직조된 한 권의 책이 시사하는 바는 결코 건조하지 않다.

찰리 스미스와 토냐 번딕이 2013년 3월 저지른 방화로 전소돼 간신히 외벽만 남은 미국 버지니아주 애커맥 카운티의 고급 리조트 ‘위스퍼링 파인스’. 지역의 랜드마크가 사라지자 당시 애커맥 주민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돌베개 제공
연쇄 방화의 범인은 애커맥의 주민인 찰리 스미스와 토냐 번딕. 이들은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혼 경험이 있는 데다 최근 어머니를 잃었다는 공통점이 있어 깊이 사랑에 빠졌다. 마약 중독자였던 찰리는 토냐를 만나 마약을 끊었다. 토냐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면 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처음 불을 지른 건 토냐였지만 그가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때부터는 찰리가 불을 질렀다.

저자는 이들 방화범의 정체를 첫 번째 챕터에서 밝힌다. 범인의 뒤를 쫓는 게 이 책의 목적은 아니라는 뜻이다. 대신 그는 선량한 시민이던 두 사람이 왜 ‘불 지르는 사람’이 됐는지 과거를 추적한다.

토냐는 지독한 가정 폭력과 가난에 시달리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싱글맘으로 두 아들을 홀로 키우다 찰리를 만나 새로운 삶을 꿈꿨지만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활활 타는 불을 보며 스트레스를 풀고 희열에 빠졌다. 토냐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처한 곤경을 들키고 싶지 않아 화려한 옷을 입고 다녔다. 마약 중독에서 갓 벗어난 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들은 낮에는 호화로운 결혼식을 상상했지만 밤에는 드라이브를 나가 빈 건물에 불을 질렀다.

저자는 여기에서 시야를 한 번 더 확장한다. 연쇄 방화가 발생한 곳이 왜 애커맥이었을까? 그는 ‘자본 집중화가 낳은 지방 고유 개성의 박탈’을 근본적인 문제로 꼽는다. 지방의 소도시는 한때 낭만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자본이 대도시로 몰리며 소도시의 주민들은 돈을 벌기 위해 대도시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애커맥에 빈집이 그토록 많았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소도시에 남은 주민들은 폐허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국이자 정치적으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조차 지방 소멸의 문제에 직면해 있음을 이 책은 실감나게 보여준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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