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30년 만에 임나일본부 망령서 벗어난 신덕 고분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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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신덕 1호분 왜인 아닌 지역수장 무덤 가능성 높아”
30년 미공개 발굴조사 결과 이달 말 발표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던 전남 함평 ‘신덕 1호분’ 전경(왼쪽 사진). 위는 둥글고 아래는 각이 진 열쇠구멍 모양은 전형적인 
전방후원분 형태다. 이곳에서 출토된 금동관(오른쪽 사진)은 다각형의 구획과 꽃무늬가 조합된 양식 등으로 미뤄 볼 때 백제 공인이 
제작한 것으로 분석됐다. 유리구슬, 쇠비늘갑옷 등과 더불어 무덤 주인이 지역 수장 신분임을 보여준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던 전남 함평 ‘신덕 1호분’ 전경(왼쪽 사진). 위는 둥글고 아래는 각이 진 열쇠구멍 모양은 전형적인 전방후원분 형태다. 이곳에서 출토된 금동관(오른쪽 사진)은 다각형의 구획과 꽃무늬가 조합된 양식 등으로 미뤄 볼 때 백제 공인이 제작한 것으로 분석됐다. 유리구슬, 쇠비늘갑옷 등과 더불어 무덤 주인이 지역 수장 신분임을 보여준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임나일본부설에 이용될 우려로 인해 30년간 공개되지 않은 삼국시대 ‘신덕 1호분’ 발굴조사 결과가 이달 말 발표된다. 동아일보가 미리 입수한 발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고분 출토 유물에서는 백제와 왜(倭)의 문화가 혼재된 양상이 확인됐다. 조사 결과를 분석한 한일 고고학자들은 20, 3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이 무덤의 주인이 지역 수장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한반도에 진출한 왜인이 묻혔을 것으로 보는 임나일본부설의 시각과 배치되는 것이다.

1991년 3월 도굴 흔적이 발견돼 첫 조사가 이뤄진 신덕 1호분은 일본의 고대 무덤에서 흔히 발견되는 열쇠구멍 모양의 전형적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앞은 네모지고 뒤는 둥근 봉분을 가진 무덤)’이다. 신덕 1호분은 이런 봉분 모양 탓에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쓰일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하지만 조사 결과 부장 유물들에 백제와 왜 문화가 혼합돼 있어 이들과 교류한 영산강 일대 지배세력이 무덤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 무덤 주인은 20, 30대 남성

신덕 1호분에서 출토된 유리구슬.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신덕 1호분에서 출토된 유리구슬.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국립광주박물관이 일본 연구자들까지 참여시킨 신덕 1호분 발굴조사 보고서를 전격 발간키로 한 건 6세기 영산강 일대 지배세력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고고학 증거들이 최근 발견된 데 따른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의 한계가 명확해졌다는 얘기다. 앞서 박물관은 이 무덤을 1991년부터 2000년까지 네 차례 조사했지만 당시에는 조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다. 김낙중 전북대 교수(고고학)는 “6세기 전엽 영산강 유역의 현지 세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이 밝혀져 임나일본부설에 의해 왜곡 해석될 여지가 줄었다. 신덕 1호분 발굴조사 보고서 발간에 일본 학자들까지 참여시킨 건 국내 학계의 자신감이 반영된 결과”라고 말했다.

무덤 안에서 나온 ‘쇠비늘갑옷’. 가죽 끈으로 엮기 위해 뚫은 구멍이 나있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무덤 안에서 나온 ‘쇠비늘갑옷’. 가죽 끈으로 엮기 위해 뚫은 구멍이 나있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보고서에 따르면 신덕 1호분에서는 무덤 주인의 높은 신분을 보여주는 금동관, 금동신발, 연리문 구슬, 중층 유리구슬, 큰칼, 비늘갑옷, 투구, 말띠꾸미개 등의 다양한 부장품이 출토됐다. 무덤에서 출토된 치아 6점의 크기와 마모 정도를 분석한 결과 20대 후반~30대 중반의 남성이 묻힌 것으로 추정됐다.

● 금동관․금동신발 백제 장인 솜씨


무덤에서는 백제와 왜의 문화가 뒤섞인 양식이 여럿 확인됐다. 백제, 왜, 가야의 문화를 폭넓게 받아들인 영산강 일대 지배세력의 문화수용 양상이 반영된 것. 다카타 간타(高田貫太)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는 보고서에 포함된 ‘함평 신덕 1호분 출토 관, 식리에 대하여’ 논고에서 두 매의 측판이 발꿈치와 발등에서 결합된 금동신발 구조를 근거로 백제 공인이 부장된 금동신발을 제작한 것으로 봤다. 금동관 역시 귀갑(龜甲·거북 등딱지) 무늬를 새긴 양상이 금동신발과 흡사해 동일한 기술전통을 가진 백제 공인이 제작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에 비해 전방후원분 구조나 꼰 형태의 둥근고리칼(環頭大刀·환두대도)은 왜계 문화의 속성으로 분류됐다. 관테 위로 두 개의 산봉우리가 솟아난 모양의 광대이산식(廣帶二山式) 금동관은 왜와 백제의 요소가 혼합된 양식이다. 그는 “신덕 1호분은 영산강 유역 사회의 주체적인 대외 교섭과 적극적인 외래 묘제 수용의 움직임을 보여준다”며 “이곳에 묻힌 이는 백제, 왜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지역집단의 수장층으로 볼 수 있다”고 썼다.

국내 고고학계도 6세기 전엽 백제 왕권이 영산강 유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이를 견제하기 위해 왜, 가야와 활발히 교류한 이 지역 수장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김낙중 교수는 ‘함평 신덕 1·2호분의 분구와 석실’ 논고에서 “취사 선택적 묘제의 도입을 보면 무덤 축조 주체는 현지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며 “(무덤 주인은) 영산강 유역권 내 다른 어떤 지역보다 백제 중앙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지역 지배에 중추적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무덤에서는 6세기 전엽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문화교류가 활발히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유물도 다수 나왔다. 목관(木棺) 조각의 수종이 무령왕릉과 같은 ‘일본산 금송’으로 판별된 사실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유리구슬 41점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이 중 5점(녹색 및 황색 유리)의 원료 산지가 태국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임나일본부 망령#신덕 고분#함평 신덕 1호분#지역수장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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