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내면 깊숙이 숨겨둔 非윤리성에 관하여

이호재 기자 입력 2021-07-17 03:00수정 2021-07-1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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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았다/백가흠 지음/328쪽·1만4000원·문학동네
남자는 한밤중 우연히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술에 잔뜩 취해 어묵을 먹고 있었다. 이미 먹은 어묵 꼬챙이가 수십 개는 될 듯했다. 여자는 옷을 잘 차려입고 얼굴도 아름답건만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다. 그의 발이 추워 보였다. 남자는 남편 때문에 괴로워하는 여자에게 동정심인지 사랑인지 모를 마음을 품는다. 어느 날 남자는 여자와 함께 여자의 집으로 향하는데…. 사건이 벌어지기 전 남자는 여자에게 다시 한번 묻는다. “남편이 죽었으면 좋겠다면서요.”

이 단편 소설집의 표제작인 ‘같았다’는 삶의 목적을 잃고 표류하는 남녀의 이야기를 담았다. 두 사람은 결국 여자의 남편을 죽인다. 하지만 둘 다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는다. 남자는 긴장감도 없이 쏟아지는 졸음에 맥을 못 추고, 여자는 아파트 밖에서 자기 집 창문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들의 내면에는 공허만 있다. 성별, 나이, 계층은 다르지만 인생의 덧없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같았다’.

백가흠 소설의 주인공들은 방황한다. 단편 ‘훔쳐드립니다’의 주인공 남성은 영문학 박사과정을 마쳤지만 도둑질을 하면서 산다. ‘1983’은 한국계 미국인이자 입양아인 남성이 자신은 누구냐는 질문을 던지며 고통스러워한다. 주인공들은 누군가와 소통하기보다 자기 고독의 심연 속으로 파고든다. 마음 깊이 숨겨둔 광기와 삶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살펴본다. 친절한 설명 없이 속마음을 꺼내는 주인공을 보다 보면 언뜻 거북하고 불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뒤에는 윤리성을 부순 후 맛볼 수 있는 쾌감이 찾아온다. 우린 항상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지만, 백가흠의 소설을 읽을 때만큼은 술에 취한 듯 꿈을 꾸듯 우리 내면은 늘 바람직하지만은 않다는 걸 받아들인다. 원고 기한을 맞추지 못해 늘 편집자에게 거짓으로 둘러대는 소설가가 등장하는 ‘그는 쓰다’의 한 문장은 사람들이 원하는 지식인의 모습은 아니지만 한 노동자의 속마음을 솔직히 드러낸다. “(이유 없이 편집자에게) 거짓말한다. 청탁도 없고 발간 예정도 없다. 일상에서도 그는 소설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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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재 기자 hoho@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내면#윤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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