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고두심에게서 발견한 소녀의 얼굴…“난 멜로에 목말라 있던 사람”

김재희기자 입력 2021-06-21 16:34수정 2021-06-2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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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물이 들어가 수건으로 연신 귀를 후비는 제주 해녀 진옥(고두심)를 무릎에 뉘인 경훈(지현우)은 살살 면봉으로 귀를 문질러 준다. 귀가 간지러워서였는지, 마음이 간지러워서였는지, 혹은 둘 다였는지 진옥의 얼굴에는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번진다. 술에 취해 찾아와 “삼촌”(제주에서 남녀 불문하고 손윗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라며 진옥을 부르는 경훈의 목소리에 그는 통금을 깨고 부모님 몰래 연인을 만나는 이처럼 걸음을 보채고 나와 경훈을 부둥켜 안는다. 경훈이 샤워를 하는 모습을 문틈 사이로 발견하고는 뛰는 가슴과 벌개진 볼을 부여잡고 무작정 길을 걷기도 한다.

올해 나이 일흔, 연기경력 49년의 고두심에게서 소녀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1972년 MBC 공채 탤런트로 합격해 그해 ‘수사반장’으로 데뷔한 그는 1980년 ‘전원일기’에서 맏며느리 은영 역을 맡으면서 ‘엄마 전문 배우’가 됐다. 33세에 ‘설중매’(1984)에서 인수대비의 노년까지 소화했을 정도로 나이 든 역을 많이 했다. 늘 멜로에 갈증이 있었다는 고두심은 30일 개봉하는 영화 ‘빛나는 순간’에서 다큐 제작을 위해 제주도를 찾은 33살 연하 PD 경훈과 사랑에 빠지는 70세 해녀 진옥을 연기하면서 한을 풀었다. 21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난 멜로에 목말라 있던 사람이에요. 멜로를 안 주고 맨날 엄마 역할만 주기에 ‘대한민국 감독님들 눈이 다 삐었냐’고 했어요. 내가 멜로에 맞게 성형하면 되느냐고 얘기한 적도 있죠. 그에 대한 한이 있었어요. 이번 영화에서 나이 차이가 몇 살 나는지에는 고민도 없었어요. ‘고두심이 멜로 못 할 게 뭐 있어?’라는 생각이었죠.”

배우 고두심(왼쪽)이 14일 오후 서울 용산CGV에서 열린 영화 ‘빛나는 순간’ 언론배급시사회에 지현우와의 호흡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빛나는 순간’은 제주 최고의 해녀 진옥(고두심)과 그를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를 찍는 PD 경훈(지현우 분)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2021.6.14/뉴스1 © News1

띠동갑 커플에게도 삐딱한 시선이 가곤 하는, 사랑의 다양성에 관대하지 못한 한국사회. 33살의 나이차를 극복한 진옥과 경훈의 사랑에 고두심은 공감했을까? 그는 “좀 특별난 사랑이지만 마음먹기 달렸다”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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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인 진옥은 생과 사를 넘나드는 할머니에요. 못할 게 없지. 경훈이 가진 아픔을 보고 ‘치유해줘야겠다, 내 속에서 모든 걸 다 끄집어내서 사랑해줘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경훈도 그런 진옥을 보고 안도하고, 기대고 싶은 마음을 가진 게 아닐까요. ‘진옥은 나에게 뭐든 다 내주겠구나, 나에게 자락을 깔아 주고 날 덮어주겠구나’라는 마음. 그런 사랑이 아니었겠는가 싶어요.”

영화는 제주도 해녀의 고된 삶, 제주의 아픔인 4·3사건 등도 진옥의 입을 통해 담는다. 4·3사건 당시 간난아기였던 진옥이 부모님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걸 눈앞에서 지켜본 순간을 떠올리며 오열하는 장면은 실제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고두심이 가장 혼신을 다해 촬영했다. 해당 장면은 NG없이 한 번에 찍었다.

“직접 겪진 않았지만 부모님께 들었던 당시 이야기가 내 뼈와 살에 콕콕 박혀 있었나봐요. 감독님이 대사를 몇 줄 적어주지도 않았는데 그냥 막 나오는 거에요. 누군가 총을 겨누고 있고 부모님이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상황이 절절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처럼요. 내 속에서 실타래가 마구마구 풀어지는 것 같아서 스스로도 너무 놀랐어요.”

70대에 33살 연하남과의 멜로를 찍은 고두심에게 그 다음 파격은 무엇일까.

“나이 든 배우들에게서 끄집어낼 수 있는 좋은 요소들이 정말 많아요. 그걸 작가들이 발견해서 많이 써줬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는 여배우가 너무 빨리 젊은 역할에서 벗어나고 누군가의 엄마 역할을 맡게 되는 게 불만이죠. 제가 특정 배우, 특정 작품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어떤 배우를 붙여 놔도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붙을 자신은 있어요. 하하.”

김재희기자 jetti@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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