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궤도 떠도는 사람들 첫 만남의 찰나… 뻔한데 묘한 ‘홍상수 코드’

김기윤 기자 입력 2021-05-20 03:00수정 2021-05-20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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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인트로덕션’
분절된 듯 연결된 세 이야기
만나서 따뜻한 충돌 이어져
영화 ‘인트로덕션’에서 주인공 영호(신석호·오른쪽)가 강원 동해의 한 해변에서 헤어진 여자친구 주원(박미소)을 만난 장면. 콘텐츠판다 제공
겹쳐지고 포개진 저마다의 궤도를 돌던 행성들. 이 천체들이 마침내 어느 한 시공간에서 충돌하려는 순간, 우린 곧 이어질 거대한 폭발이나 거친 격정을 떠올린다. 하지만 홍상수 감독의 25번째 우주에서 이 충돌은 따뜻한 포옹으로 그려진다. 단, 충돌 이후는 알 수 없다. 서로를 소개하고 만나며 살짝 느껴본 맛보기 단계, 딱 거기까지다. 이 과정을 우린 영어로 ‘인트로덕션(introduction)’이라 부른다.

홍상수 감독의 25번째 장편이자 제71회 베를린영화제 은곰상(각본상) 수상작인 흑백영화 ‘인트로덕션’은 인물들의 소개와 첫 만남의 순간을 담은 작품이다. 주인공이 아버지, 여자친구, 어머니를 찾아가는 여정을 따라가며 인물 사이를 감도는 묘한 분위기를 표현했다. 홍 감독의 작품 중 첫 영어 제목이기도 하다. 예고편에서 공개한 서문을 통해 홍 감독은 “(한국어에는) 영어의 인트로덕션에 하나의 단어로 대응하는 말이 없다”며 “소개, 입문, 서문, (새것의) 도입 등의 뜻을 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66분 러닝타임은 3개의 이야기로 구성됐다. 1부에서 주인공 영호(신석호)는 한의사 아버지(김영호)의 전화를 받고 한의원에 찾아가 아버지 대신 간호사(예지원)를 만난다. 2부서 독일로 유학 간 영호의 여자친구 주원(박미소)은 엄마(서영화)와 엄마 친구(김민희)를 만나고, 자신을 따라 독일을 찾아온 영호와 재회한다. 3부에는 영호가 엄마(조윤희)의 전화를 받고 친구(하성국)와 함께 대배우(기주봉)를 만난다. 느슨하게 얽히고설킨 구성은 전작 ‘도망친 여자’와도 비슷하다.

인물들의 만남에는 형언하기 힘든 어색함이 흐른다. 불편한 정적과 여백은 ‘홍상수 코드’로 점철된 말과 은유가 가득 채운다. 피식거리는 실소도 자주 터져나온다. 그의 영화 문법에서 빠지지 않는 술자리 장면은 3부의 기주봉 조윤희 신석호 하성국이 맡았다. 작위적 줌인, 줌아웃에 뻔하고 밋밋한 전개를 예상하고 봐도 긴장감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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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이야기에는 공통적으로 포옹 장면이 한 번씩 나온다. 수많은 소개, 만남의 순간에서 홍 감독은 조금이나마 인간들 사이 ‘온기’에 대해 말하고 싶어 했음이 보인다. 막 인생의 도입부에 선 청년 영호를 놓고 본다면, 불안한 미래와 사랑 앞에서 흔들리는 그에겐 어딘가 늘 안길 곳이 있음을 말하는 듯하다.

영화는 기승전결을 따르지 않고 종잡을 수 없는 여운을 남기며 끝난다. 일부 외신은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 대해 많은 내용을 함축한 시나 문학작품 같다고 평했다. 얄밉지만 이번에도 홍 감독의 비유를 짚어내려면 꽤나 힘을 쏟아야 할 듯하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홍상수#인트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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