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탄핵 위기의 조선 사신들 구한 ‘열하일기’

김상운 기자 입력 2021-04-03 03:00수정 2021-04-03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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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구범진 지음/352쪽·1만7000원·21세기북스
드라마 ‘조선구마사’ 사태에서 보듯 한중관계를 바라보는 대중의 날 선 시선은 패권성에 가 있다. G2로 부상한 후 미국과 극한 갈등을 벌이는 중국의 ‘힘의 외교’에서 한국인들은 제국주의 시대의 착취와 억압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사회주의 중국뿐 아니라 봉건주의 청나라도 영화 ‘남한산성’(2017년) 등에서 보듯 병자호란 때 인조가 이마에 피를 흘리며 행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청 황제 배알 시 이마가 땅에 닿을 듯 3번 절하는 것)의 굴욕으로 기억돼 있다.

이 책은 소(小)중화 사상에 따라 18세기 동아시아 최강국 청을 백안시하던 조선이 돌연 태도를 바꿔 1780년 건륭제의 칠순 축하사절을 보낸 사건을 조명하고 있다. 특히 건륭제의 명으로 박명원 등 조선 사신들이 티베트 고승 판첸 라마를 접견한 사건에 얽힌 비화를 추적한다. 그해 특사단은 청 황제의 여름별장이 있는 열하(熱河)에서 판첸 라마를 만나 불상을 선물로 받았다. 지금 시각에서 보면 아무 일도 아니겠지만 당시엔 그렇지 않았다. 숭유억불을 신봉하던 조선 사대부들에게 오랑캐가 준 불상은 ‘더럽고 사악한 것’으로 간주됐다. 그렇다고 황제가 깍듯이 존경하는 고승의 선물을 함부로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자는 이와 관련해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위기에 빠진 특사단에게 강력한 알리바이를 제공했다고 말한다. 불상을 갖고 압록강을 넘은 특사단이 정치·사상적 탄핵을 피할 수 있도록 기록한 측면이 있다는 것. 예컨대 박지원은 특사단장 격인 박명원이 판첸 라마와 만난 직후 청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절하지 않았음을 열하일기에서 강조했다. 이는 청나라 예부가 조선에 보낸 문서의 일부 내용(‘조선 사신들은 판첸 라마를 절하며 뵈더니(拜見) 성스러운 스님을 우러러 바라보며 축복의 은혜에 흠뻑 젖을 수 있었다’)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었다. 저자는 “열하일기에서 판첸 관련 부분은 뜻하지 않은 봉불(奉佛) 혐의로 비난의 대상이 된 박명원 일행의 변호를 위해 박지원이 고안한 주도면밀한 구성의 산물”이라고 썼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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