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투박해진 용, 18세기 ‘화려한 컴백’

김태언 기자 입력 2021-03-26 03:00수정 2021-03-26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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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서 보는 ‘조선 용’ 변천사
조선왕조 ‘존엄’ 상징 용무늬항아리
임란 거치며 힘차고 단순하게 변화
영-정조때 왕실위엄-정교함 되찾아
17세기에 제작된 ‘백자철화 구름용무늬항아리’(왼쪽 사진)의 용무늬는 선이 굵고 거친 느낌이다. 그런데 18세기에 만들어진 ‘백자청화 구름용무늬항아리’의 용은 얼굴, 몸통, 발가락의 스케치가 정밀하고 전체적으로 근엄한 분위기를 풍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용은 우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신령한 존재의 상징으로 칼과 옷, 자기 등에 그려졌다. 조선왕조는 15∼19세기 꾸준히 용무늬항아리(용준·龍樽)를 만들었다. 최근 새롭게 단장한 국립중앙박물관 ‘분청사기·백자실’에선 시대 상황에 따라 다양한 변천을 겪은 조선의 용무늬를 확인할 수 있다.

용무늬항아리는 왕실 존엄의 의미를 담아 각종 행사에서 의례용기로 쓰였다. 1467년(세조 13년) 확립된 관요(官窯·국가가 운영하는 도자기 제작소)는 청화안료로 항아리를 제작했는데, 17세기 이전 것들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돼 문헌으로만 전한다. 당시 의례 종류에 따라 용은 조금씩 다르게 장식됐다. 세종실록과 국조오례의에 그려진 용은 발톱 3개에 턱수염이 있다. 국조오례의서례에선 5개의 발톱에 뿔이 있는 용이 그려졌다. 주요 국가 행사에선 5개 발톱의 용무늬가 주로 사용됐다.

그런데 17세기 들어 간략하고 투박한 용무늬가 등장한다. 이 시기 용무늬항아리는 청화(靑華)가 아닌 철화(鐵華)백자로 바뀐다. 전란으로 국가 재정이 악화돼 중국에서 청화안료 수입이 어려워진 데 따른 것이다. 이때 용무늬는 뿔과 수염, 코, 이빨, 다리, 발가락 등 세부묘사가 생략됐다. 특히 17세기 후반 제작된 구름용무늬항아리는 빠른 필치로 힘차고 자유로운 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국립중앙박물관은 2010년 발간한 도록 ‘백자항아리 조선의 인과 예를 담다’에서 “왕실은 물론 사대부나 서민의 민수용 항아리에도 용무늬가 사용되면서 점차 해학적이고 익살스럽게 변했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이 시기 왕실이 물을 상징하는 용무늬를 기우제에 사용하기 위해 이런 양식을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문헌에 따르면 숙종(재위 1674∼1720년) 연간에 기우제가 집중적으로 열렸다. 최윤정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은 “용무늬철화백자를 제작한 유일한 민요(民窯·민간의 도자기 제작소)가 한양과 가까운 경기 가평군 하판리에 있었다. 질 좋고 큰 백자가 제작된 걸 보면 왕실이 주문 제작한 걸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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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는 용무늬가 다시 화려하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바뀐다. 백자청화 구름용무늬항아리는 높이 50cm가 넘는데 당당한 몸체에 주변 장식이 섬세해졌다. 이는 영·정조 때 왕실의 위엄을 되찾기 위해 의례를 강화한 데 따른 것이다. 18세기 들어 관요 체제가 정상화되면서 정교한 작업이 가능해진 것도 영향을 끼쳤다. 이수경 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18세기부터 용이 제대로 된 품위를 보여주며, 이는 왕실의례용 용무늬항아리로 정립돼 19세기까지 유지됐다”고 말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중앙박물관#조선 용#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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