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강인함은 한국인 할머니가 남긴 유산이죠”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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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핀 오 유엔 세대평등포럼 사무총장
6·25직전 남한에 온 할머니, 홀로 아버지 등 3남매 키워내
오빠는 佛마크롱 정부서 장관… 프랑스인 어머니 늘 지지해줘
‘여자라서 안돼’란 말 한적 없어, 하원의원 거쳐 유엔으로 진출
중요한 자리엔 한복 입게 돼

델핀 오 유엔 세대평등포럼 사무총장은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할머니가 홀로 아버지를 키워 오늘날의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저 역시 어린 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찾고 싶다”고 말했다. 북한도 두 번 방문한 그는 “같은 외모와 언어를 지닌 민족이 행복해 보이지 않아 슬펐다”고 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델핀 오 유엔 세대평등포럼 사무총장은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할머니가 홀로 아버지를 키워 오늘날의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저 역시 어린 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찾고 싶다”고 말했다. 북한도 두 번 방문한 그는 “같은 외모와 언어를 지닌 민족이 행복해 보이지 않아 슬펐다”고 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한 여성이 월남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그는 폐허가 된 서울에서 홀로 삼남매를 키웠다. 교수가 된 아들은 프랑스 여성과 결혼해 아들과 딸을 낳았다. 아들은 프랑스 디지털경제부 장관이 됐고, 딸은 프랑스 하원의원을 거쳐 유엔 세대평등포럼 사무총장이 됐다. 세드리크 오(오영택·39)와 델핀 오(오수련·36) 남매다. 이들은 한국인이라는 뿌리를 늘 기억하며 세계를 누비고 있다.

최근 한국을 찾은 델핀 오 유엔 세대평등포럼 사무총장을 14일 서울 강남구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프랑스 그랑제콜(소수정예 특수대학)을 나와 베를린자유대,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을 졸업한 그는 주한 프랑스 대사관, 미국 뉴욕 주재 프랑스 총영사관, 미국 싱크탱크인 스팀슨센터에서 근무했다. 유엔 세대평등포럼은 여성 인권을 향상시키는 일을 한다. 그는 “지금의 내 삶은 강인하고 헌신적이셨던 할머니가 남긴 유산(legacy)에 빚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그는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이사장 최정화 한국외국어대 교수)이 수여하는 한국이미지상 징검다리상을 받았다. 올해 17회를 맞은 한국이미지상은 한국 문화를 알리고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 힘쓴 개인과 단체에 수여한다.

○ 어릴 때도 지금도, 한복과 함께


그는 노란색 원피스에 한복 저고리 동정을 단 검은색 재킷을 입었다.

“인사동 단골집에서 산 재킷이에요. 한국에 올 때면 종종 이런 옷을 산답니다. 편하고 예뻐서 즐겨 입어요. 사람들이 디자인이 독특하다고 하면 한복을 응용한 거라고 얘기해줘요.”

어릴 때부터 중요한 행사에는 한복을 입었다고 했다. 이달 3일 미국 연방하원 개원식에서 메릴린 순자 스트리클런드 의원이 붉은색 저고리와 보라색 치마를 입고 취임 선서를 한 데 대해 “멋진 한복 패션을 선보여 감탄했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 오영석 전 KAIST 초빙교수(73)와 어머니는 집에 TV를 두지 않고 늘 책을 읽으며 대화하는 분위기에서 남매를 키웠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각별한 사이인 세드리크는 한 인터뷰에서 “델핀이 공부를 더 잘해서 성적표를 받는 날이면 긴장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얘기를 하자 그는 큰 웃음을 터뜨렸다.

“오빠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아버지를 통해 경험한 한국의 교육 방식은 잠재력을 최대치로 끌어낸다고 생각해요.”

아버지는 틈틈이 한국어도 가르쳤다. 연세대 어학당을 6개월 다닌 그는 “더 오래 한국어를 공부하지 못한 게 아쉽다”고 했다. 어머니가 외국인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쳤기에 집은 늘 여러 나라 사람들로 북적였다.

“다양한 국적을 지닌 이들을 보면서 국제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꿨어요. 부모님은 ‘여자 아이가 그러면 안 돼’라고 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뭐든 해보라고 지지해주셨죠.”

그렇게 자란 그는 가슴이 뛰는 일을 찾아 거침없이 달렸다.

○ “꿋꿋했던 두 할머니가 롤 모델”


당찬 그였지만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여전하다고 했다. 32세에 하원의원이 됐을 때도 이를 느꼈다.

“저보다 나이 많은 남자 보좌관 두 명과 일했는데, 회의나 행사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저를 비서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뒤쪽 자리로, 남성 보좌관들은 앞자리로 안내했죠. 프랑스에서도 젊은 여성 의원은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항상 의원 배지를 가슴에 달고 다녀야 했어요.”

그는 두 할머니가 롤 모델이라고 했다. 친할머니는 사별로, 외할머니는 이혼으로 각각 홀로 자녀들을 키웠다.

“두 분은 묵묵히 희생하고 모든 걸 꿋꿋하게 견뎌내며 독립적으로 사셨어요. 전쟁을 겪으며 홀로 아이들을 키웠다는 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요. 가끔 고집 센 아빠를 볼 때면 할머니를 상상하곤 해요.(웃음)”

그는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여성이 늘어나고 있다고 우려했다.

“경제, 사회적 위기가 닥치면 여성들이 먼저 해고되는 경우가 많아요. 미국에서는 코로나19로 일자리를 잃은 이들 가운데 4분의 3이 여성입니다. 집에 있는 시간이 증가하고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기는 어려워지면서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도 늘고 있어요. 유엔에서는 이를 ‘섀도 팬데믹(Shadow Pandemic)’이라고 부릅니다.”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소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앞으로 많은 시간 동안 싸워야 할 겁니다. 삶을 즐기기 위해 필요한 싸움이죠. 롤 모델을 찾고 스스로도 롤 모델이 되세요. 단,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할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세요. 저도 힘을 보탤 겁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델핀 오#유엔 세대평등포럼#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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