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이번 수수께끼는 더 풀기 힘들 것 같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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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히가시노 게이고 지음·최고은 옮김/551쪽·1만8000원·알에이치코리아

참 부지런한 작가다. 데뷔 후 35년간 50여 권의 책을 냈으니 매년 1권 이상씩은 꼬박 내온 셈이다. 이것도 큰 재능이다. 지치지 않고 쉼 없이 달릴 수 있다는 것은.

물론 아무리 천재라도 다작이면 범작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작가도 위기를 느꼈는지 책 시작 전 ‘새로운 수수께끼 풀이 방식을 시도한 작품입니다. 덕분에 작가 수명이 조금 더 늘었을지도’라는 문구를 자필 서명과 함께 넣었다. 그래도 이 작가는 항상 신간이 나올 때마다 ‘이번에 뭘 썼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부지런한 작가답게 작품에는 현실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등장인물들의 처지나 행동, 주변 상황을 보면 코로나19가 터진 이후에 구상한 작품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여서 동시대성이 주는 생생함이 현실감을 더한다.

사건의 개요는 간단하다. 도쿄에서 직장을 다니며 결혼을 앞둔 주인공 마요는 고향(이름 없는 마을)에 계신 아버지가 피살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교사 출신으로 주민과 제자들의 존경과 신망을 한껏 받은 아버지의 사망을 믿을 수 없는 마요는 서둘러 고향으로 내려간다. 원한이나 금전관계에 의한 살인도 아니어서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울 즈음 갑자기 오래 연락을 끊고 지내던 마요의 삼촌, 즉 죽은 아버지의 동생 다케시가 번쩍 나타나 형의 죽음을 파헤친다. 마요의 동창생들이 하나둘씩 아버지의 죽기 전 행적과 연관이 있는 것이 드러나는데….

대저택과 같은 밀폐된 공간만 아닐 뿐이지 이름 없는(외부로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에 동창생 몇 명 등장하는 정도여서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세팅을 갖고 있고, 가장 살인자일 것 같지 않은 사람이 살인자가 되는 결말 역시 낯설지 않다.

저자가 말하는 새로운 수수께끼 방식은 아무래도 사건을 해결하는 ‘블랙쇼맨’인 다케시 삼촌이다. 전직 마술사 출신인 그는 사건 단서를 구하기 위해 소매치기나 도청을 서슴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상황을 넘겨짚어 용의자들로부터 얘기를 끌어내는 만능재주꾼이다. 조카(마요)에게 밥 사라고 채근하는 ‘쪼잔한’ 캐릭터이면서도 뒤에선 은근히 챙겨주는 ‘츤데레’다. 거기에다 막판에 삶에 대한 통찰까지 보여주는 매력적 캐릭터를 작가는 창출해냈다. 시리즈의 첫 시작이라고 하니 이 요란스럽고 호들갑 떠는 탐정의 활약상은 지켜볼 만할 것 같다.

작가는 확실히 자기 것 혹은 자기가 지켜주고 싶은 것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잘 짚어낸다. 돈이나 명예 지위가 아니라 평생 쌓아올리거나 절실히 지키고 싶은 것에 대한 욕망을 말한다. 이 같은 욕망의 이면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용의자 X의 헌신’ 등에서 보듯 지키고 싶은 욕망과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서로 상승작용을 하며 과감하고 대범한, 때로는 불의의 사건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추리소설의 결말이 드러났을 때 통쾌하거나 정의롭기보다는 애잔하고 스산한 느낌이 밀려온다.

550쪽이 넘지만 작가 특유의 드라이하고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전개 덕에 속독에 익숙하고 결말이 궁금해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독자라면 하루 만에 읽을 수 있다. 숨겨진 단서를 찾겠다고 굳이 한 줄씩 뜯어볼 필요는 없다. 책값은? 아깝지 않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히가시노 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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